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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론 변화와 월남 패망 과정
趙甲濟
2017년 05월31일  
동맹국의 여론을 잘못 관리하면 망하는 수가 있다.   

  
*박정희가 지켜본 월남 패망 과정  

1972년 10월21일 駐韓 미국대사 하비브가 키신저와 만나고 와서 朴 대통령에게 협정안을 보고하자 그는 몇 가지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미 월남으로 침투해 있던 월맹 정규군의 철수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朴 대통령은 맨 먼저 문제 삼았다. 당시 약 14만 명의 월맹군이 월남에 들어와 베트콩으로 위장하여 싸우고 있었다. 미국과 세계의 많은 언론은 이들이 自生的(자생적)인 反독재 투쟁조직이라고 오보했다. 월남 침투 월맹군에 대해서는 잔류를 허용하고 駐越(주월) 미군은 철수시키고, 휴전협정에 대한 국제감시는 불가능한 이런 협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朴 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越南戰 참전국 元首(원수)로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한국 상황과 대비하여 보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이런 협정을 맺으면 티우 정부와 월남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막대한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며 월남 정부는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나흘 뒤엔 駐越 한국대사 柳陽洙(유양수) 씨를 불러 歸任(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걱정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티우 대통령도 미국의 키신저가 들고 온 협정안을 거부했다. 1972년 10월22일 대통령궁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를 향해서 “귀하는 월남을 팔아넘길 작정인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柳陽洙 대사를 만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와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해 주었다. 티우는 월남 내에 침투한 월맹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휴전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는 또 1954년의 제네바협정의 再확인을 요구했다. 그래야 앞으로 월맹이 침략할 때 국제여론에 고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형태의 연립정부도 반대한다고 했다. 월맹 측은 중앙정부에서 마을단위까지 티우 정부와 베트콩 사이의 연립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左右(좌우)합작으로써 월남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고전적인 술책이었다.    

키신저는 월남 정부를 압박하여 字句(자구) 수정 정도만 한 뒤 10월26일에 협정안을 발표하고 31일 파리에서 조인할 계획이었으나 티우의 거부로 霧散(무산)되었다. 키신저에게 티우는 거의 막말 수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공산당과 직접 대화하지 않고 귀하가 중계를 했는데 귀하는 누구 편인가. 왜 적에게 호의적이고 우방을 희생시키려 드는가. 왜 월남의 외국 군대는 60일 이내에 철수한다고 해 놓고 들어와 있는 월맹군에 대해서는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가.”  

小國이 자신을 도와준 大國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미국이 서둘러 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물러나려 한다고 판단하여 北進(북진)통일 선언과 反共(반공)포로 석방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李承晩 정부를 달래기 위하여 韓美상호방위조약, 국군현대화 계획, 주한미군 유지 등을 약속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한반도 평화와 한국 번영의 울타리가 되었다. 티우 대통령은 그러나 닉슨을 상대로 그런 게임을 할 수 없었다. 그가 李承晩만큼 유능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여론과 언론이 反戰, 反티우로 돌아서 있어 미국 안에서 지지세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티우에 대해서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침공하면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응징할 것이고 경제·군사적 원조를 계속할 것임을 문서로 보증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티우가 동의하지 않자 1973년 1월16일 닉슨은 티우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는 이 편지에서, 티우 정부가 휴전협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과 월맹이 조인을 강행할 것이며 자신은 “월남 정부가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美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월21일 티우는 결국 굴복한다. 그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미국이 사이공 정부를 월남의 정통정부로 인정한다는 것, 월맹은 월남에 병력을 잔류시킬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聲明(성명)해 줄 것’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휴전협정은 1월23일 파리에서 가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이때부터 휴지 조각이 되었다. 휴전협정 이후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떨어질 때까지 월남 내의 전투는 더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파리휴전협정은 월맹 협상전술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은 戰場(전장)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얻었다. 월맹은 미국 여론을 反戰, 反티우로 돌려놓기 위해서 전투를 하고 협상을 했다. 미국 여론이 한번 돌아가 버리니 월맹의 월남적화 전략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미국의 언론과 의회였다.    

월맹이 월남을 赤化(적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닉슨 대통령이 티우에게 약속했던 군사적·경제적 원조 및 협정 위반時의 군사적 응징조치 약속이었다. 국가원수의 이런 약속은 조약에 준하는 효력을 갖는데 美 의회가 월맹이 할 일을 대신해 준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美 군사력을 인도차이나의 육상이나 상공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닉슨 대통령의 발목을 묶어 버렸다. 월남에 대한 군사원조액도 의회에 의해 깎여 나갔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 사임한 닉슨을 이어 포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의회와 언론의 反戰행태는 계속되었다. 휴전협정을 어겨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을 가진 월맹은 월남 내의 공세를 강화하여 협정 이후 20개월 사이 2만 6000명의 월남 군인이 戰死(전사)했다.    

휴전협정 이후 1년 반 사이 월맹은 13만 명의 월맹 정규군을 월남으로 추가적으로 침투시키고 결전에 대비한 도로망 정비, 보급품 쌓아두기를 계속했다. 휴전협정이 금하고 있는 탱크, 장갑차, 로켓포, 장거리포, 對空砲(대공포)까지도 남쪽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회고록 《再生의 시기》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월맹군의 침투와 협정 위반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은 월남의 목을 죄고 자신의 응징능력을 마비시켜 갔다. 이 비극은 월맹정규군이 월남을 침공하는 사이 미국은 국론이 분열하여 이를 방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CIA는 1974년 5월23일자 ‘국가정보평가서’에서 ‘월남군은 주도권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해·공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 월남군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대규모 지원만이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라고 예측했다.    

월맹은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1975년의 작전을 준비해 갔다. 월맹 지휘부는 자신들이 월남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할 경우 미국이 약속대로 월남을 돕기 위해 해·공군력을 동원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고심했다. 이들은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월맹공산당 서기장 레 두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월맹군 사령관 반 틴 둥의 회고록).

“미국 행정부의 내부 갈등과 정당 사이의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이공 괴뢰정권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줄고 있으며 미국은 사이공 정권의 파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1975년 월맹군은 푸옥롱省의 省都(성도)인 푸옥빈을 점령했다. 월남전 사상 省都가 공산군에게 점령되고도 탈환하지 못한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고 다음 단계의 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2년 전의 의회 결의로 인해 포드 행정부는 이런 중대한 협정 위반행위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답답한 키신저는 월맹 상공에 대한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필리핀 수빅 만을 출항하여 인도양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號(호)를 월맹의 통킹만으로 접근시켜 월맹 측에 경고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월맹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대한 협정 위반을 한 월맹은 오히려 미국 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하여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편승하여 포드 행정부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의회와 언론은 더 큰 협정위반자인 월맹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에 덤벼들었다. 미국 국방장관이 나서서 변명해야 할 판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의회로부터 국방예산 심의를 받아야 할 시점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수빅 만을 출항하자마자 하노이는 또다시 미국이 침략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외쳤다. 美 국방성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통킹만 접근계획을 취소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월남 방어 의지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총리 팜 반동은 “우리가 미국에 뇌물을 주어서 개입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월남을 구해 보려고 했다. 그들은 탄약이 떨어져 가는 월남 정부에 대해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을 하려고 美 의회에 승인을 요청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포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비난해 오던 反共의 보루 헨리 잭슨 상원의원도 “인도차이나의 문제는 3억 달러의 무기구입비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티우 대통령은 이때 전략적 부대 배치 전환을 단행한다. 중부고원 지대를 지키던 정예 공수부대들을 해안의 다낭기지 부근으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방어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戰線(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 이것이 월맹 지휘부에 나쁜 신호를 보냈다. 하노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해로 예정했던 사이공 진격을 이 기회에 해치우기로 결단했다. 이 침략행위를 덮기 위해서 월맹은 전형적인 위장 평화공세에 나선다. 그들은 정치협상을 제안한 것이다. 그 내용은 ‘미국의 개입을 중단시키고 파리협정을 실천하기 위한 새 정부를 사이공에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그제야 이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3년 전 그는 파리협상의 상대자인 레둑토가 표정도 바꾸지 않고 ‘티우 암살’을 제안했던 것을 기억했다고 한다. 정규군을 동원하여 월남을 침공함으로써 파리휴전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월맹이 ‘휴전협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티우 정부를 교체하자’는 취지의 제안을 해도 미국의 언론은 ‘온건한 제안’이라고 환영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975년 3월 6일자 사설에서 포드 대통령이 신청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미 통과된 對월남 원조액의 삭감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또 그가 타협하고 양보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군사지원을 줄여야 한다.>

미국의 敵이자 협정 위반자인 월맹에는 침묵하고 우방이자 피해자인 월남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대한 것이 당시 언론과 의회였다. 대중정치시스템에선 여론이 ‘反戰평화’로 돌아 버리니 언론과 의회도 휩쓸려 들고 행정부도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월맹은 이때 미국 내의 언론과 反戰단체, 그리고 의회를 자신들의 편으로 조종하고 있었던 셈이다. 월맹은 월남 내에서는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 그리고 순진한 민주투사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티우와 포드 대통령은 이런 월맹 전략에 의해 여론과 언론과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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