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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두 번 구하고도 욕만 먹은 트루먼 이야기
趙甲濟
2017년 06월07일  

   대통령의 오늘 현충일 추념사에 빠진 것이 있다. 북한이 불법 억류한 6만 명의 국군포로 송환 요구, 미군 참전에 대한 감사 표시, 김일성이 남침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想起.
  국가기념일은 국민들이 국민 자질을 갖추기 위하여는 꼭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을 기억시키기 위한 것이다. 대통령이 트루먼이란 이름을 이런 자리에서 언급하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국을 두 번 구하고도 욕만 먹은 트루먼을 새삼 소개한다.
  
   나는 강연을 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여기 계시는 분들을 포함하여 5000만 국민들은 이 분의 결심이 아니었더라면 김정일 治下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닙니다. 외국인입니다. 우리 역사상 외국 사람 한 분에 의하여 민족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처음입니다."
  
   청중들 속에서 "맥아더!"라는 답이 나온다.
   "틀렸습니다. 맥아더가 멋대로 한국에 왔습니까? 맥아더를 보낸 분이 누구입니까?"
   그래도 "해리 S 트루먼"이란 정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트루먼이란 恩人(은인)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1950년 6월25일 北의 南侵(남침)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1960년대 초에 월남식으로 赤化(적화)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6.25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駐韓美軍(주한미군)이 철수하고 韓美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美國이 연150만 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우리를 구해주었던가? 美 군부는 한국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고 주한미군을 1년 전에 철수시켰는데 누가 美軍을 보내 5만4000명이 죽고 10만 명이 다치는 血戰(혈전)을 벌인 끝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공산침략으로부터 구출했던가?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
  
   6월24일 미주리 인디펜던스
  
   1950년 6월24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週末(주말)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었다. 토요일인 이날 오후 그는 비행기 편으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로 날아왔다. 밤 9시쯤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매릴랜드에 있는 집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말렸다.
   “야간 비행은 위험하고, 지금 국민들을 놀라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해야 할 조치는 취했습니다. 잠이 오시면 푹 주무세요.”
   일설에 의하면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곁에 있었던 딸 마가렛의 회고에 의하면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3차大戰(대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다음 날 트루먼은 일찍 일어나 동생 비비안의 목장에 갔다. 그는 비비안의 다섯 손자 손녀들과 악수를 하고는 우유 짜는 기계와 새로 산 말을 살펴보았다. 그날 아침 신문과 방송에선 南侵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으나 트루먼은 한국사태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오 직전 무초 대사가 보낸 電報(전보)가 그에게 건네졌다.
   <공격의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임이 분명해졌다>
   12시30분 애치슨 장관이 다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트루먼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이니 오후 2시에서 2시15분 사이에 캔사스 시티 공항으로 집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했다.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끌다
  
  
   워싱턴으로 날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그는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게 하여 저녁 식사를 겸한 고위 대책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약 3시간의 비행시간 중 트루먼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나는 과거 민주국가들이 이런 공격을 저지하지 않아 침략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슷한 사건들이 2차대전을 불렀듯이>
   대통령 전용기 인디펜던스號(호)가 워싱턴의 국립공항에 착륙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이 마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로 향하는 車中(차중)에서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블레어 하우스에는 14명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모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식사가 끝나고 食卓(식탁)이 정리된 뒤 회의가 시작되었다. 딘 애치슨 장관이 상황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참석자 전원이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匕首(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다.
   브래들리 合參(합참)의장은 “공산당에 대해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주도했다. 그의 결심이 회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트루먼은 브래들리의 말을 받아서 “선을 단호하게 그어야 한다”고 했다.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 소련은 도박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싫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을 공짜로 삼키려 한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아무도 미국이나 유엔이 물러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선 무슨 수든지 써야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끄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애치슨이 건의한 정책들을 트루먼이 승인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駐韓 미국인을 철수시킬 것, 제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이날 회의는 미군을 사용한 한국 방어를 결정하고 밤 11시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을 피하기 위하여 뒷문을 통해서 빠져나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함구령을 내렸다.
  
  
   “육군도 보내라”
  
  
   다음날(워싱턴 시간 6월25일, 서울 6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은 일반적인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미국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맥아더 원수는 “한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할 수 없다.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날 저녁 트루먼 대통령은 블레어 하우스에서 다시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 개입 결정이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海, 空軍力을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날 회의도 애치슨 국무장관이 주도했다. 브래들리 合參의장은 머지 않아 육군이 투입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한국에 대한 전쟁계획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허전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전쟁을 하기 싫다. 지난 5년간 애써온 것은 오늘 밤 내가 해야 하는 이런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워싱턴 시간으로 6월27일.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 나갔다. 오전 11시30분 의회 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의 西館(서관) 각료실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에 의하여 전쟁을 지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의회가 별도로 전쟁 결의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백악관 대변인 찰리 로스가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를 代讀(대독)했다. 上下院(상하원) 합동회의도 이날 315 대 4표 차이로 징병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를 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날 밤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편성하여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1950년 6월30일 새벽 3시 美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의 電文(전문)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 아니라 육군의 투입이 있어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지체 없는 명확한 결정을 바란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트루먼은 벌써 일어나 면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우선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주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하여 자유국가를 지켜내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아시아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된다는 걱정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날 日記(일기)에서 트루먼은 “毛澤東(모택동)은 무슨 짓을 할까. 러시아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물의 銘文(명문)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파병된다. 3년간 戰場(전장)에서 5만 명이 죽고 10만 명 이상이 다쳤다. 우리 역사상 한국인의 운명이 외국인 단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5000만 한민족을 구한 위대한 人格
  
  
   트루먼은 미군을 투입하여 한국을 지켜내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당시 미 군부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의 派兵(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학자들이 참전결정의 이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분석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성격과 인간됨이었다.
   그는 미주리의 가난한 農家(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도회사 檢數員(검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직접 작은 상점도 꾸려 가다가 대공황 때 부도를 낸 적도 있는 서민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20세기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陸士(육사)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다. 1차 대전이 터지자 나쁜 視力(시력)을 속이고 자원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장교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골사람이었다. 순박하고 솔직하고 용감하며, 힘 센 사람이 으스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反骨(반골)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스탈린이 金日成을 앞세워 뺨을 때린 격이었다. 슬며시 돌아드는 게릴라전이 아닌 공개적인 전면 南侵은 최대강국 미국의 체면과 함께 트루먼의 성깔을 자극했다.
   인간 트루먼이 한국을 살린 것이다. 그런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모른다는 19세 이상 成人 인구가 15%, 약 500만 명이다. 트루먼을 기억하게 하는 공원이름, 거리이름이 없다. 트루먼 동상은 판문점 근방 잘 안 보이는 곳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서울 강남의 테헤란路를 트루먼路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번 더 한국을 구하였다. 1950년 10월, 수십만의 중공군이 북한지역으로 들어와 대공세를 펴고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맥아더 사령관은 만주 폭격, 중국 해안 봉쇄, 蔣介石(장개석) 군대 투입, 原爆(원폭) 사용 검토 등을 요구하였다. 트루먼은 그렇게 되면 소련이 개입, 3차대전이 일어나고 유럽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하였다. 맥아더는 "그렇다면 한국에서 철수, 일본만 지키자"고 했다. 영국 에틀리 수상도 美英 정상회담에서 한국 포기를 건의하였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이 한 말이 우리의 가슴을 친다.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을 포기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이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싸우다가 져서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미리 포기해선 안 된다"고 엄명하였다.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美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반격작전을 지휘, 서울을 수복하고 전선을 38선 부근으로 밀어올림으로써 한국은 두 번째로 구원받았다.
   한국인들은 트루먼이 抗命(항명)한 맥아더를 해임한 것을 잊지 않고 "트루먼 때문에 통일을 하지 못하였다'고 불평한다. 트루먼의 두 번 결단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통일되었겠지만 赤化통일 되었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협상 때도 인도주의 원칙을 견지하였다. 북한군 및 중공군 포로 중 귀환하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유의사 존중의 원칙'을 제시, 관철시켰다. 그가 퇴임할 때까지도 휴전이 되지 않아 퇴임시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중 최저였다. 냉전이 서방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다. 한국전 참전 결단, 원폭 투하 결단, 마셜 플랜 및 NATO 창설,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맞선 空輸(공수)작전 등 트루먼이 내린 중요한 결정들이 서방 자유 진영의 승리를 보장하였다. 요사이 학자들의 歷代(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트루먼은 늘 10位圈(위권)에 들어간다. 트루먼 대통령의 위대한 人格(인격)이 한국인 5000만 명을 살린 것이다.
  
  
  *해리 S. 트루먼(1884~1972)
  
  미국 부통령으로 있다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急死(급사)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확고한 역사의식과 자유에 대한 신념으로 2차 대전과 한국전을 지도, 세계를 구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이 자유진영의 수호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끌고, 공산전체주의의 팽창을 막는 결정적 조치들을 취하여 40년 뒤 "악의 제국"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원자폭탄 투하 결정으로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마감, 한국을 해방시킨 후, 유엔감시하의 자유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지원하고, 트루먼 독트린 선언, 베를린 봉쇄 극복, 마셜 플랜, NATO 창설, 對蘇 전략(NSC-68) 입안 등으로 소련의 침략주의를 견제하였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불법남침을 일으키자 즉각적으로 미군 파병을 결정하고 유엔군 창설을 주도, 한국을 살렸다.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유엔군이 총퇴각, 한국을 포기하자는 국내외의 압박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면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 본격적인 對蘇(대소) 봉쇄망 구축에 들어갔다. 韓美軍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공산침략군을 저지하는 사이에 트루먼은 대만 보호를 선언하고 일본의 경제부흥, 독일의 재무장, NATO 강화, 국방비 증액으로 본격적인 군비경쟁을 시작, 자유진영이 냉전에서 이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는 또 공무원과 군대에서 흑백 차별을 금지시키는 행정명령으로 흑인 인권 향상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李承晩과 트루먼이 지도한 한국전은 이젠 "냉전 승리를 예약하여 인류를 구한 聖戰"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두 지도자는 유엔군이 한국과 미국의 이익을 넘어 인류 전체의 자유를 지키는 위대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신념을 공유하였다. 트루먼은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원칙을 발표, 반공포로들을 구하였지만 공산군 측의 반발로 휴전이 늦어져 수 만 명의 미군이 더 희생되었다. 그는 한국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여론이 악화되자 불출마를 선언하고 역대 최저의 지지율을 보이는 가운데 퇴임, 고향으로 돌아가 淸貧한 삶을 이어갔다. 트루먼은 국제 공산주의의 붕괴를 戰後하여 인기가 높아져 전문가들의 조사를 종합한 최근 랭킹에선 43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 중 6등으로 평가된다.
  
  그는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가는 데도 모범을 보였다. 세계 최고의 권력자에서 시골의 평범한 서민으로 돌아간 것이다. 퇴임 때 그의 수입은 1차 대전 참전자로서 받는 군인 연금(월112 달러)밖에 없었다. 트루먼은 기업체나 상업성과 연관되는 일체의 활동을 거부하고 은행 대출금으로 생활하면서 회고록 집필로 수입원을 마련하였다. 1955, 56년에 나온 두 권의 회고록은 미국 역대 대통령으로선 최초였다. 67만 달러의 인세수입을 올렸지만 3분의 2를 세금으로 납부하였다. 트루먼은 또 자신의 기록물을 기증, 기념 도서관을 건립하여, 그 후 다른 대통령들이 따라 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의회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규정을 만든 것도 트루먼 이후이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일찍부터 정치를 시작하였던 트루먼은 미국 보통사람들의 우직한 용기와 정직과 유머 감각, 그리고 독서로 함양한 역사의식이 종합된 지도력을 구사하였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보스"라는 별명을 지닌 트루먼은 역대 최고의 장관으로 평가 받는 딘 애치슨과 조지 마셜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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