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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쟁 50주년에 떠오르는 라빈 수상
趙甲濟
2017년 06월07일  
3군참모총장으로서 승리를 이끌었던 그는 1995년 11월 팔레스타인과의 화해협상을 이끌다가 유대인 청년에게 암살되었다.

  

오늘은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친 한 '작은 전쟁' 의 50주년이다. 1967년 6월7일 이스라엘 공군의 이집트 비행장 기습으로 일어난 이른바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패배한 아랍 국가들에 복수심을 심어 지금까지 계속되는 중동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이집트는 그 6년 뒤 이스라엘을 기습하는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은 초전에 크게 밀려 한때 핵폭탄 사용도 검토하였다. 샤론 장군의 반격전으로 휴전을 이끌어냈지만 1977년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고 화해한다. 이 화해를 주도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그 수년 뒤 암살되고 6일 전쟁을 지휘하였던 이스라엘의 참모총장 이츠하크 라빈은 그 뒤 수상이 되어 팔레스타인과 화해 협상을 이끌다가 동족 청년에게 암살되었다. 1995년 11월의 이야기이다. 나는 라빈 수상이 암살되기 하루 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기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라빈의 회고록에서 가장 재미있는 章은 1967년 6일전쟁 직전의 상황에 대한 3軍 참모총장으로서의 관찰이다. 한 국가가 외부의 위협에 맞서 國內의 異見들을 통합해가면서 어떻게 전쟁을 결심하게 되는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1급 문서이다. 적어도 한국의 국가지도부를 구성한 사람은 이 부분을 꼭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특히 신라의 통일전쟁 이후 한번도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결단으로써 전쟁을 결심한 전통이 없는 한국의 정치 엘리트에게는 이 책이 有用할 것이다.

1967년 5월23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스라엘의 紅海 출구인 티란해협을 봉쇄한다고 발표했다. 병력을 시나이 반도로 前進배치시키고 시리아, 요르단과는 연합전선 체제를 구축했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말살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때 이스라엘 총리는 레비 애쉬콜. 그는 전쟁이 박두한 상황에서 야당과 政敵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벤 구리온 계열의 인물-다얀, 페레스 같은 이는 라피黨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집권노동당은 국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 소수당과 연립하고 있었는데 이 소수당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다. 벤 구리온측에서도 애쉬콜은 전쟁지도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해서 총리가 겸직하고 있던 국방장관직을 내놓으라고 정치 공세를 폈다. 정치인들은 외교적 수단으로 티란해협의 봉쇄를 풀어보려고 했으나 이스라엘군에서 「즉각 開戰」을 주장했다.

내가 라빈 수상을 인터뷰하기 전에 만났던 그의 친구 호레브氏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제는 우리의 敵이 양적으로 엄청난 우위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흔히 質 對 量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는데 전쟁에선 量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저절로 質로 전환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루살렘 전투에서 우리는 20명의 정예 군인들을 데리고 200여 명의 敵兵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질이 좋지 않은 군인이라 해도 200명이란 질량 그 자체가 질을 높이는 수가 있습디다.

우리 군은 6일전쟁 때 3주 동안 기다렸습니다. 전투명령 하달을 기다렸어요. 우리는 開戰의 시간을 끌수록 敵의 대비는 더욱 강화되고 반대로 우리의 희생은 더 커질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와 정치인들 사이에 끼여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이가 라빈 참모총장이었습니다.』

5월28일 각의에서는 開戰 여부를 놓고 투표를 했는데 9 대 9였다. 총리는 이럴 경우 결정권이 없으므로 開戰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敵前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라빈도 흔들린다.

〈담배연기 자욱한 회의실에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끝에 나는 심신이 탈진하여 집에 돌아왔다. 지난 며칠간은 정말 끝없는 미로였다. 車中에서 식사를 하고 거의 자지 못했으며 증기기관차처럼 줄담배를 태웠다. 나는 작전참모부장 에제르 와이즈만을 불렀다. 『내가 사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고 두 번 세번 설득한 뒤 돌아갔다. 아내 레아는 주치의를 불렀다. 그는 나에게 진정제를 주었고 나는 다음날 정오까지 자버렸다. 5월24일 저녁 나는 직책에 복귀했다.>

1974년에 라빈과 페레스가 집권노동당의 총리후보직을 놓고 경선에 들어갔을 때 와이즈만은 6일전쟁 직전의 라빈이 보였던 이런 약한 모습을 기록하여 폭로한 적이 있다. 그 와이즈만은 라빈 수상 시절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開戰을 미룬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 티란해협 봉쇄를 풀어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존슨 대통령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 내각은 전쟁을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6일전쟁은 이스라엘 空軍이 아침 교대시간에 맞춰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 대부분의 전투기들을 활주로상에서 파괴함으로써 開戰 30분 만에 사실상 戰勢를 결정지었다.

이스라엘軍은 공군의 엄호를 받지 못한 이집트 地上軍을 기갑부대로 돌파하고 시나이 반도를 석권했다. 그들은 또 시리아군을 골란고원에서, 요르단군을 東예루살렘과 요르단江 西岸에서 몰아냈다. 라빈 총장이 1등 功臣이 된 6일 전쟁의 결과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눈부신 성공이었으나 그 속에는 라빈의 생명을 앗아갈 싹이 배태되고 있었다.

영토를 넓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東예루살렘·요르단江 西岸과 가자지역에 사는 100만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治下에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치하가 위해 민주국가인 이스라엘은 「탄압」을 해야 했다. 「민주적 유대인 국가」가 國是인 이스라엘로서는 모순에 빠졌다.

라빈 총장이 다얀 국방장관과 함께 舊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사진은 유명한데 이때의 기분을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수년 간 나는 이스라엘의 建國뿐 아니라 예루살렘 서쪽 벽의 수복에 있어서 一役을 담당하게 되기를 몰래 꿈꾸었다.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왜 이런 특권을 누리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평생 그토록 감정이 고양된 절정의 순간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舊예루살렘에 있는 서쪽 벽은 「통곡의 벽」이라 불려진다. 로마시대 때  파괴된 예루살렘城의 남은 흔적이다. 이 성벽은 유대인이 언젠가는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염원을 일깨워주는 상징 역할을 해왔다. 라빈은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만은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존속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페레스 당시 외무장관은『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는 폐쇄될 것이며 종교적으로는 개방될 것이다』는 발언을 했다.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정치적 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유대교·회교·기독교의 3大 종교 聖地로서 종교적으로는 어떤 종교인에게도 개방될 것이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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