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동본부 - nac.or.kr

시나리오/대한민국 최후의 날
趙甲濟
2017년 09월05일  
  1장 대한민국 최후의 날


1-1. 쿠바 미사일 사건


핵전쟁을 막은 사람


1962년 10월27일, 미국이 쿠바에 배치된 소련 핵미사일 철거를 요구하면서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소련 핵 잠수함 B-59호가 미국 함대에 발각되었다. 미국 함정은 폭발력이 약한 폭뢰를 터트렸다. 소련 잠수함은 해상봉쇄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으나 물 속에서 본부와 교신을 할 수 없었다. 근처에서 폭뢰가 터지는 충격을 느낀 잠수함 지휘부는 전쟁이 났다고 판단하였으나 본부와 연란을 할 수가 없었다. 함장은 핵어뢰를 발사하기로 하였다. 교전 규칙은 이런 경우 발사는 고참 장교 3명이 전원 합의로 하게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이 토의를 벌이는데 정치장교는 함장의 견해에 동의하였으나 동승하고 있던 잠수전단 지휘관 바질리 아르키포프가 반대하였다. 그는 이 잠수함에서 서열 2위였으나 1961년 그린랜드 근해에서 발생한 잠수함 K-19 사고 처리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K-19호는 핵추진 잠수함인데 냉각시스템이 고장 나서 원자로가 녹아내릴 지경이 되었다.

아르키포프는 7명의 기관요원들에게 방사능 노출을 무릅쓰고 수리 작업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들의 영웅적 노력으로 수리에 성공, 대재앙을 막았지만 그 뒤 한 달 내로 기관요원 7명은 전원 사망하였다. 2년 내로 15명의 승무원들이 더 죽었다. 이런 아르키포프였기에 핵어뢰 발사 반대를 고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핵어뢰 발사를 포기한 B-59 잠수함은 해상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함대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해상이었으므로 소련 잠수함은 귀환 길에 올랐다. 만약 이때 B-59 가 나가사키 원폭과 맞먹는 폭발력을 가진 핵어뢰를 미 해군 함대를 향하여 발사하였더라면 美蘇 간에 핵전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이 사실은 쿠바 미사일 사건 40년 뒤에 밝혀졌다. 아르키포프는 1998년 72세에 죽었다. 死後에 핵전쟁을 막은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사망원인도 방사능 노출이라고 한다. 핵위기 때는 오판이 핵전쟁을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

1961년 4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하자 마자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제거하기 위하여 피그 만에 친미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켰으나 격퇴당하여 국제적 창피를 보았다. 두 달 뒤 비엔나에서 있었던 미소(美蘇) 정상 회담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케네디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그는 케네디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1962년 여름 흐루시초프는 카스트로를 설득, 그해 9월부터 쿠바로 중거리 핵미사일과 전술핵무기를 들여보내고 미사일 발사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정거리 2000~4500km의 핵미사일은 미국의 코 밑에 배치되어 워싱턴 뉴욕 등 미국의 심장부를 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합참은 쿠바의 소련 미사일은 세계적 범위에서 전략적 균형을 바꿀 정도라고 평가하였지만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약5000개의 전략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소련은 300개밖에 되지 않았다. 수십 기의 핵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된다 한들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다.
흐루시초프는 불리한 핵전력(核戰力)을 보완하고 쿠바를 방어하며 이탈리아와 터키에 미국이 배치한 핵탑재 가능 미사일을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하여 모험을 한 것이다. 소련 지도부에선 반대자도 많았지만 흐루시초프는 일단 배치가 끝나면 유약한 케네디는 기정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겼다.
그해 10월 미국 CIA가 U-2 정찰기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사진을 판독,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대책회의가 연일 열렸다. 케네디는 보안에 신경을 썼다. 언론에 사태가 보도되면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에 쫓기게 되고 졸속 결정을 내릴 위험이 있는데 다행히 정보가 새지 않았다. 나중에 케네디는 '나에게 48시간의 여유밖에 없었더라면 폭격을 결정하였을 것이다'고 했다. 해상봉쇄가 아닌 폭격이나 침공작전을 폈더라면 쿠바의 소련군 사령관이 핵무기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대책반은 쿠바에 소련이 핵폭탄까지 반입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하였다. 미사일용 메카톤급 핵폭탄뿐 아니라 100개나 되는 전술핵무기도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냉전이 끝난 뒤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경우에도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하였는가'에 대한 확증(確證) 없이 해야 할지 모른다. 케네디는 쿠바 해상 봉쇄를 결심하면서 핵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3분의 1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핵공격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22일 저녁 7시 중계방송을 통한 연설에서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공격용 무기의 반입 금지)를 선언하고 소련에 대하여 핵미사일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연설의 핵심은 다음 대목이다.
'(앞으로) 쿠바 지역에서 발사되는 핵미사일이 우리의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의 나라를 타격할 경우,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전면적 응징을 가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미국이 핵무장한 북한에 대하여 군사조치를 취할 경우에도 비슷한 경고를 할 것이다.
'북한 지역에서 발사되는 핵미사일이 우리의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의 나라를 타격할 경우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북한정권에 대하여 전면적 응징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압도적인 핵보복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핵폭탄으로 한국, 일본, 괌,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연설에서 자신의 선택이 핵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선택한 길은 어렵고도 위험한 길임이 분명합니다. 이 길이 어디로 갈지, 얼마나 많은 대가(代價)와 희생을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무엇보다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항상 비싼 법입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항복하거나 굴복하는 길입니다.'
그는 또 봉쇄의 표적이 카스트로 정권이지 쿠바의 일반 주민이 아니란 점을 밝힌다.  
1962년 10월26일 미군은 데프콘 2를 발령했다. B-52 전략 폭격기는 핵폭탄을 싣고 하늘에서 대기하였다. B-47 중거리 폭격기는 여러 비행장으로 분산되어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1436대의 전략 폭격기중 8분의 1이 공중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145기의 대륙간탄도탄 미사일이 발사 명령을 기다리는 태세에 돌입하였다. 145대의 핵무장한 요격기도 비상 대기. 반면 소련은 대응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견해는 과장이라고 한다. 미국은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소련은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미국도 이탈리아 터키의 미사일 철수

쿠바 미사일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도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연구하고 있을 한국과 미군의 전문가들에겐 시사점이 많다.
*케네디 대통령은 합참 등 군 지휘관들의 강경론을 누르고 막후 협상의 문을 열어놓았다. 폭격으로 시작된 위기였다면 핵전쟁이나 전면전으로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해상봉쇄로 시작하니 선택지가 많아져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다. 케네디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밀사로 삼아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과 접촉하게 하였다.
*압박만 한 게 아니라 소련에 양보할 카드를 준비하였다.
*기선(機先)을 빼앗긴 흐루시초프는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이 총동원된 상태에서는 군사적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국 타협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과 폭격기를 철수시키는 대신에 몇 가지 중요한 양보를 얻는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개적 약속과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밀약(密約)이 그것이다. 미국은 완승(完勝)을 추구하지 않았고, 흐루시초프는 완패(完敗)하지 않았다.
*문제는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미군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미국의 약속을 비밀에 붙이기로 한 점이다. 이를 발표문에서 빼버리니 흐루시초프가 완패한 게임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소련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그 2년 뒤 흐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해임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쿠바 미사일 사건 대응 실패였다.

미국도 몰랐던 전술핵 100개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모든 핵프로그램의 폐기를 요구하면서 해상봉쇄 등 군사적 조치를 취할 때에도 협상과 양보안을 준비할 것이다. 이 안에 한국의 국익(國益)을 해치는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 미국이 터키에 배치된 미군 핵미사일을 철수할 때도 터키 정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북한정권은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고 나올 것인가? 한미동맹 해체 또는 평화유지군으로 위상 변경, 미북(美北) 평화협정 체결 및 수교 등이 예상되고 중국은 이를 응원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안전을 해치지 않도록 하려면 대북(對北) 군사적 조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발언권을 확보해두어야 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1월20일에 끝난다. 소련은 42기의 미사일과 일류신 28 폭격기 편대를 쿠바에서 철수시켰다. 후일담이 많다. 30년 뒤에 밝혀진 사실인데, 해상봉쇄 당시 쿠바에 있던 소련군은 100개 정도의 전술핵을 가지고 있었다. 대포 및 폭격기용이었다. 미국은 그때 전술핵 배치 사실을 몰랐다. 철수 대상 목록에도 들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이 전술핵을 쿠바에 넘겨 주어 카스트로를 달래보려 했다. 소련 공산당의 고참 정치국원 미코얀은 쿠바로 가서 위기 수습을 맡는데, 카스트로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것을 보고는 전술핵을 넘기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미코얀은 여러 시간의 설득 끝에 카스트로로 하여금 전술핵에 대한 미련을 접도록 만들었다. 전술핵은 해상봉쇄가 끝난 1962년 12월 선편(船便)으로 소련을 향하여 떠났다.


1-2. 김정은, 핵카드를 꺼내다


초조해지는 김정은

앞으로 2~3년 사이 아무런 군사적 조치 없이 북한 핵전력(核戰力)이 경량화, 소형화, 다종화, 정밀화의 길을 달려간다면 대한민국은 혼자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종속적 상황, 더 나아가서 전쟁상태로 빠져들지 모른다. 북한은 핵무기를 소형화하는 데 성공하여 100개에 육박하는 핵폭탄을 단·중·장거리 미사일 및 잠수함에 장착,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게 된다. 핵을 가지면 전략적, 정책적 응용이 다양해지고 유연해진다. 한국은 정당과 언론이 북핵 문제에 무관심한 가운데 친북(親北), 친중(親中) 세력이 여론을 오도(誤導), 자위적 핵무장에도 반대하고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도 방해, 핵전(核前)무장 해제 상태로 노출된다.

북한에선 김정은이 핵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르려 할 때 말릴 사람이 없고, 한국에선 막을 방법이 없다. 발사 후 5분 안에 서울 상공에서 폭발, 한 발 당 30만 명 이상이 죽는데도 한국인들은 “설마 김정은이 쏘겠나”, “미국이 가만 있겠나”라는 자세이다. 핵방어망 건설을 위하여 복지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먹히지 않는다. 정당들이 그런 공약은 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은 종합적인 핵전력(核戰力)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나 심각한 체제 위기에 직면한다. 계속되는 국제 제재로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통치자금이 고갈된다. 휴대전화를 매개로 한 사회의 개방화 추세를 막을 수 없어 외부 정보가 유입되고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전반적으로 약해진다. 무역과 관광에 종사하여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들 가운데 이탈자가 늘어난다. 자녀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탈북하는 상류층 신종 탈북자가 대세(大勢)를 이룬다. 북한 노동당 조직부를 중심으로 한 체제 관리가 장교, 외교관, 기술관료, 상인들의 도전을 받는다.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가속화되어 예전처럼 폭압적인 통치가 어렵다. 80% 이상의 주민이 배급이 아닌 시장에 의존, 생계를 유지하면서 당에 의한 통제력도 허물해진다.

김정은 정권은 초조해진다. 체제의 운명을 걸고 건설한 핵전력(核戰力)을 사용하여 위기를 돌파하지 않으면 정권이 안으로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백령도를 공격한 다음 핵카드를 꺼낸다

북한이 1980년대부터 핵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온 이유에 대하여 자유진영에서는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체제를 보장해주면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판단, 6자 회담, 햇볕정책, 일방적 대북(對北) 지원을 해 보았지만 실패하였다. 북한이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핵무장의 길을 선택한 것은 핵무기로 남한을 공산화, 한반도를 통일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목표가 북한 노동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소위 전문가들은 편리한대로 해석하였다.

경제력이 거의 50배나 되는 한국이 인접하고 있는 한 북한은 장기적으론 체제 유지를 할 수 없다. 남북한 체제 대결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樣式)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므로 한반도에서 정통성 있는 국가는 하나여야 한다. 소위 수령 지도 체제의 영속적 유지를 위해서는 한국을 종속화시키거나 공산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김정은은 현상타파를 결심한다. 지금부터는 가상 시나리오이다.

그는 백령도에 대한 포격을 명령한다. 군인 및 민간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한다. 한국군은 여러 차례 공언한대로 원점 타격으로 보복에 나선다. 공군 전투기 수십 대가 출격, 백령도 포격을 명령한 군단 사령부와 포대를 공격, 파괴한다. 이번엔 북한 쪽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생긴다.

다음 날 김정은이 직접 나서서 중대 발표를 한다. 요지는, “○월 ○일까지, 우리를 공격한 한국군의 책임자들(국방장관, 합참의장, 공군참모총장을 특정)을 처벌하고, 손해를 배상하며, 백령도를 넘겨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의 한 도시에 대하여 핵무기를 쓰겠다”는 최후통첩이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이 긴급 전화 회담을 갖고 대책을 의논, 미국이 한국에 약속해온 핵우산 정책, 즉 확장된 억지 전략을 적용하기로 하였다고 공동 발표한다.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과 잠수함이 한반도로 전개된다. 중국은 이에 대응, 해군에 동원령을 내린다. 북한은 만약 미국이 공격해오면 미국의 서부지역을 핵공격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핵전쟁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대규모 시위대가 평화를 외치면서 서울 시내를 점거하고, 북한의 핵공격 위협을 규탄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방어적 대응을 비판한다. 많은 국민들도 “일단 핵전쟁은 막아야 한다”면서 한미(韓美)의 강경대응에 반대한다. 갤럽 여론조사에선 70% 이상이 ‘평화를 위하여 북한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응답을 하였다.


서울을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를 희생시킬 수 있나?

이런 가운데 정치권에서도 한국군의 원점 타격이 과잉 대응이었다는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된다.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주장하는 의견은 목소리가 약하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던 미국에서도 의회와 언론을 중심으로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를 희생시킬 순 없다”는 여론이 일어난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이나 잠수함 탑재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核공격할 때 이를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은 8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인의 안전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여론이 대세(大勢)를 이룬다. 미군 기지가 있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노출된 일본에서도 “제2의 히로시마를 반대한다”면서 미국의 대북(對北)응징 방침을 비난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난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틈을 타서 중국이 6자 회담을 제의한다. 핵전쟁을 막기 위하여 남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담판을 짓자는 것이다. 중국은 회담을 제의하면서 중북(中北) 접경 남쪽 50km까지를 ‘비행 및 무력사용 금지구역’으로 설정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는 미국의 공격을 피해 북한이 핵심 시설을 옮기려 할 때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5개국은 회담 제안을 수락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우리의 요구조건을 먼저 이행하라’고 한국을 압박한다. 며칠 뒤 북한 해역(海域)에 있는 무인도에서 핵폭발이 일어난다. 북한이 잠수함에서 소형 핵폭탄을 장착한 중거리 미사일을 고각도로 발사, 낙하시키는 실험을 한 것이다. 폭발력은 히로시마 급으로 추정되었다. 한국이 가진 허술한 방어망으론 이런 고각도 비행 미사일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미국 특사, 김정은에게 평화협정 제의

서울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인천공항을 비롯한 국제공항은 몰려 든 출국자들로 마비될 지경이다. 核민방위 훈련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정부는 뒤늦게 “핵폭탄이 떨어져도 살 수 있는 방법”을 홍보하지만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공무원들과 회사원들의 결근 사태로 국가기관과 기업의 일상 업무는 중단된다. 사병 가족들이 연일 국방부와 합참 앞으로 몰려가서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인다. 드디어 “이런 위기를 부른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을 구속 수사하라”는 주장이 심각하게 등장한다. 그럴수록 미국의 반한(反韓) 여론이 증폭된다.
미국 정부는 전직 대통령을, 한국 정부 몰래 북한에 밀사로 보낸다. 김정은을 만난 밀사는 “6자 회담에 나오라. 미북(美北) 담판도 동시에 진행하자”는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한다. 김정은은 강하게 나온다.

“우리는 핵무기를 쓸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미국이 공격하면 우리도 미국 본토를 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한국의 국방장관을 보호하기 위하여 핵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미국이 우리를 겨냥한 적대(敵對) 정책을 포기하고,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평화유지군으로 바꾼다고 약속하면 회담에 나가겠습니다. 이 약속은 공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주한미군을 평화유지군으로 바꾼다는 데는 2000년 6월 김정일-김대중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진 바가 있습니다.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맺는 한편 두 나라가 수교합시다.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대북(對北) 밀사는 워싱턴으로 돌아와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미국 국가안보위원회 긴급회의에서 CIA 부장은 2000년 6월의 김대중-김정일 회담 자료와 2007년 10월의 노무현-김정일 회담록을 찾아내 읽어본 결과를 보고한다. 김정일과 김대중이 주한미군의 성격을 남북한 사이에서 중립하는 일종의 평화유지군으로 변경, 사실상 한미(韓美)동맹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밀약(密約)을 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 사실이 보고된다. 대통령 등 지도부가 격분한다.


1-3. 미국의 密使



‘한미동맹관계를 전면 재검토한다’


미국 대통령은 부통령을 특사 자격으로 한국에 보낸다. 청와대에서 한국 대통령을 만난 미국 부통령은 10쪽짜리 메모를 펴놓고는 작심한 듯 발언을 시작하였다. 상원의원 출신인 부통령은 외교관처럼 말을 둘러대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였다. 발언록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미국 정부는 작금의 사태와 관련하여 그동안의 두 나라 관계를 리뷰하고,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론의 변화를 참고하면서 동맹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는 미국의 책임도 있지만 근원적으론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오랜 안보 무임(無賃) 승차 관행이 축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핵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하여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반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울이 북한 장사정포(長射程砲)의 타격을 받게 되니 북폭(北爆) 계획을 포기하라고 우리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때 북한을 때렸더라면 핵문제는 해결되었고 아마도 북한정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해공군력으로 북한의 핵시설을 파괴하는 데는 많아야 수십 명 정도의 희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북한의 장사정포가 서울을 포격하더라도 한 시간만 견디면 노출된 敵의 포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친 것은 유감이지만 그 뒤에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9·11사태 이후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정, 압박할 때 한국의 김대중 정부는 무엇을 했던가요? 김정일과 만나기 위하여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의 현금을 제공하였는데 우리 정보기관의 판단으론 그 돈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회담하면서 주한미군의 성격을 평화유지군으로 격하(格下)시켜 유명무실하게 만들기로 밀약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나 평양 회담의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양해하였다. 이게 가장 큰 성과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김정일이 양해한 주한미군은 북한을 적으로 보지 않는 평화유지군이지요. 그런 군대를 왜 미국이 한국에 주둔시키나요? 이 밀약은 사실상 한미동맹 해체 음모였다고 봅니다. 각하도 대화록을 읽어보았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김정일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국제무대에서 핵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북한의 입장에 서서 미국과 싸워왔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한 달 뒤 청와대를 예방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에게 노무현 씨는 ‘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것은 미국과 일본이다’고 발언하였습니다. 게이츠 장관이 회고록에서 ‘그는 약간 돈 사람이다’는 평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필 북한이 핵실험을 한 시기에 한미연합사 해체를 추진하는 것을 보고 워싱턴은 이런 한국은 동맹국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인 동맹군 지휘부로 평가 받아 일본이 모방하려고 하는 한미연합사를 해체하려는 것은 북한정권을 돕기 위한 의도이거나 북한의 핵전략(核戰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정부를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차기 정부의 등장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


‘미국은 복수할 줄 모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한국 대통령은 미국 부통령의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에 놀랐다. ‘미국 사람들은 화를 잘 내지 않지만 일단 화가 나면 무섭다’는 말이 생각났다. 수십 년 간 쌓아두었던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하였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한미 관계는 정상화되는 듯하였으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정부가 굴복하는 데 놀랐습니다. 이 사태의 핵심은 건강문제가 아니라 반미(反美)선동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관리되는 미국산 쇠고기를 가장 위험한 물질로 선동하는 데 가담한 한국의 언론, 정치, 그리고 속아 넘어가는 한국인의 분별력에 우리는 놀랐습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때 당시의 미국 정부는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내심으론 한국군이 확실한 응징으로 북한정권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길 바랐습니다. 북한군이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 민간인까지 죽인 그날 한국군이 공군기를 출격시키고도 폭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주한미군 측 보고에 따르면 합참에 근무하는 한국군의 한 장교가 ‘폭격을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다가 상관으로부터 구타를 당하였다고 하더군요. 미국은 전통적으로 복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요청으로 한미연합사 해체 시기를 연기하였습니다. 李 대통령은 실용적인 사람이라 오바마 대통령과 사이가 좋았고 일본과도 관계를 잘 유지하였습니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임기 말에 왜 한일(韓日) 관계를 그렇게 관리하였는가 입니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이 북핵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데 꼭 필요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서명을 직전에 취소한 뒤에 독도를 방문하고 그 직후 천황 폄하 발언을 한 것이 일본의 우파에 의하여 역이용되어 결과적으로 아베 정권의 등장을 돕지 않았습니까?

이 반일(反日)정책을 박근혜 정부가 이어받아 우리가 놀랄 정도로 친중화(親中化) 하니 한미일(韓美日) 삼각 동맹 관계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특히 2015년 중국의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박 대통령이 자유 진영 지도자로선 유일하게 참석하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한국전선에서, 특히 중국군의 불법개입으로 희생된 수만 명의 미군 유족들이 그 중국군의 행진을 축하하고 있는 한국 대통령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2016년 초 북한이 네 번째 핵실험을 하면서 박근혜 정부는 친중반일 노선에서 탈피, 사드 배치를 결단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였으나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사드 배치 반대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 보고 경악’

여기까지 말한 미국 부통령은 메모를 옆에 내려놓고는 한국 대통령을 정시(正視)하면서 “각하,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이 “말씀해보시죠?”라고 하자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데 왜 한국에선 ‘우리도 핵무장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한국 대통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국이 반대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다. 미국 부통령은 비아냥조의 미소를 띠면서 입을 뗐다.
“국가 생존이 걸린 문제를 다른 나라에 물어보고 결정할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미국의 허가를 받고 핵무장을 한 것은 아니죠. 미국 지도부는 속으로는 한국 정부가 핵무장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인도 같은 친미(親美) 민주 국가의 핵무장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반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막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한국이 핵무장 카드를 꺼내면 미국은 그것으로 중국을 압박, 북한의 핵개발을 좌절시키는 데 이용하려고 했는데 유감이었습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부통령은 다시 서류를 들고 설명을 재개(再開)하였다.

<2016년 여름 한국에서 벌어진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시각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드 배치는 적의 핵미사일을 막겠다는 것이고, 더구나 동맹국인 미국이 자국(自國) 부담으로 하겠다는데 이를 막고 나서는 세력이 그토록 강하고 더구나 여당 의원까지 가세하면서 국방장관을 시위대가 감금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어떤 깊은 회의(懷疑)가 미국 지도부에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이 싫어하니 사드를 배치하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는 한국이 결국은 과거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전통으로 돌아가고 말겠구나 하는 판단을 하는 이들이 늘어 갔습니다. 미국은 군사무기 배치는 비밀로 하는데 한국이 이를 공개적으로 추진하는데도 놀랐습니다.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은 그 뒤에도 악영향을 끼쳐 한국이 핵미사일 방어망을 조속히 완성하는 데 실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국군은 친북, 친중 여론을 의식하여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과 연결시키지 않는 독자적인 방어망을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좌파가 지배하는 국회가 예산을 거부, 잘 아시다시피 지금 한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한때 미국 정부는 한국의 보수층에서 요구하는 대로 1990년대 초에 철수해간 전술핵을 재배치하고 이를 한미연합사의 관리 하에 두어 한국이 사실상 공동사용권을 갖는 방안까지 검토한 적이 있으나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드 반대 경력을 가진 각하가 당선되는 것을 보고는 포기하였습니다.>

‘그것이 한국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 순간 한국 대통령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대통령이 된 뒤 현실을 파악하고 나름대로 동맹 강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부통령은 “너무 솔직하게 말씀드린 점 용서해주십시오. 오늘은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1994년에 이어 2018년 우리는 북핵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놓쳤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마지막 찬스였습니다. 북한이 예상 외로 장거리 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고 우리도 심각한 대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정보기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소형화하고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아직은 實戰 투입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예방 공격으로 핵능력을 파괴하는 데 2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작전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미국의 정보가 늘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2003년 이라크 공격 때도 후세인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오판(誤判)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CIA의 북핵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면, 즉 북한이 우리의 공격을 받고도 한 두 개의 핵폭탄을 보존할 수 있고 그것으로 한국을 공격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럴 가능성을 아주 낮게 보았습니다만 문제는 핵폭탄이란 점이었습니다. 각하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는 한국과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한미동맹이 있는 한 미국 단독의 북한 공격은 불가능합니다. 북한의 보복 공격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서울을 두고는 미군이 아무리 압도적 전력(戰力)이 있어도 예방공격은 불가능합니다.

이때 한미 양국(兩國)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2016년 사드 반대 사태로 한국이 핵미사일 방어망을 완비하지 못한 것이 이럴 때 우리의 손발을 묶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사드를 비롯하여 PAC-3, SM-3 등 다층적 방어망을 건설하고 이를 미국의 MD(미사일 방어망)와 연결시켜 두었더라면 설사 북한이 얻어맞은 뒤 남은 핵폭탄으로 보복을 가해와도 최소한의 희생을 곧 극복, 대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방어망이 허술한 상태에서도 과연 북한에 군사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로 두 나라 지도부가 고민한 사실은 각하가 잘 아시는 바입니다. 각하가 예방 공격에 가장 적극적이셨지만 이 계획이 한국 언론에 유출되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반전(反戰)시위가 일어나고 북한이 핵공격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가운데 한국 국회가 압도적 찬성으로 군사 조치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니 미국도 군사적 해결방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각하, 그게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미국의 反韓 여론이 핵우산 무력화시켜’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 청와대에서 한국 대통령을 만난 부통령은 탁자 위에 놓은 커피가 식은 줄도 모르고 한 모금 마시더니 “지금부터 미합중국 대통령의 제안을 전달하겠습니다'라고 엄숙한 태도를 취하였다.

<미국은 현재 조성된 한반도의 핵위기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합니다. 우리 두 나라의 가장 중요한 공동 목표는 북한정권이 한국을 겨냥하여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 물론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 후에는 미국의 상응한 응징이 가해질 것이지만 이런 사후적 조치는 한반도를 핵전장(核戰場)으로 만들 뿐 이성적 해결책이라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북한정권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은 핵무기가 없고 핵미사일 방어망도 완벽하지 않아 북한의 핵공격을 억지할 수단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한사코 반대하고 있으니 미국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이 제안한 6자 회담에 참석, 북한의 요구 조건을 검토하는 한편, 별도로 북한과 미국이 회담을 갖고 한국전(韓國戰)의 종식 및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북한이 평화협정에 따른 조치로 주한미군 철수나 위상 변경 등을 요구할 경우에도 핵불사용 약속을 전제로 회담에 임할 것입니다.

북한이 요구하는 한국군의 책임자 처벌과 손해 배상도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다면 한국 측이 전향적(前向的)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외교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언론과 여론은 한국에서 전개되는 반미(反美) 시위를 우려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집권당까지도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미국의 서해안이 핵공격을 당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을 핵무기로 지켜야 하는지 의문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950년 북한 공산정권이 남침하였을 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파병을 결단, 유엔군의 기치 하에 한국을 구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이승만 정부를 비롯한 한국인과 군이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의지를 보인 덕분이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그런 투지(鬪志)가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敵의 핵무기보다 동맹국의 방어무기(사드)를 더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피를 흘리라고 명령하기는 어렵습니다. 각하께서도 헌화하신 적이 있는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물엔 ‘미국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말이 새겨져 있지만 敵보다 미군을 더 미워하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명령에 응할 젊은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여론을 무시하고 한국 편만 들다가는 이번 중간 선거에서 집권당이 참패할 가능성이 높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미국의 반한(反韓) 여론 때문에 미국의 이른바 핵우산 정책 집행이 어려워졌음을 솔직히 시인하는 바입니다.>


제2의 뮌헨 회담

미국 부통령이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한국 대통령은 “그만 하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황하는 미국 부통령을 내려다보면서 말하였다.
“6자 회담이 열리면 핵을 갖지 않은 한국의 운명을, 핵보유 국가들끼리 결정하는 모양새가 될 터인데, 뮌헨 회담의 재판이 아닙니까? 이는 核으로 한미동맹을 해체시키고 한국과 1 대 1 결전으로 적화 통일하겠다는 북한의 전략에 미국이 동조하는 것 아닙니까?”
부통령은 이렇게 받았다.
“각하, 뭔헨 회담과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초청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이 체코의 운명을 결정하였지만 이번 6자 회담엔 한국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체코를 침공하겠다고 선언하였을 때 체코 정부는 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싸울 태세를 취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시 체코의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군비증강이 충분하지 못하여 체코를 도울 수가 없는 입장이었고 영국은 프랑스가 빠지려 하니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위하여 싸울 전력(戰力)이 충분하지만 한국이 앞장서지 않으니 핵전쟁을 각오하고 북한을 때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각하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한미동맹이 해체된 이후엔 한국과 북한이 1 대 1로 대결하는 것이 아니죠. 2 대 1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북한정권과 한국 내의 친북세력이 2이고, 군대를 포함한 한국의 보수세력이 1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중국이 가세하면 3대 1 아닐까요? 이는 정확히 사드 배치 찬성 세력 對 반대 세력이군요.”


‘인간은 가난에 이기지만 풍요엔 진다’

한국 대통령이 비감(悲感)한 어조로 말하였다.
“부통령께선 뮌헨 회담과 닮은 점은 빠트리시는군요. 프랑스가 같은 민주주의 국가인 동맹국 체코를 버린 점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을 처벌하면 일단 위기는 넘기겠죠. 문제는 그 뒤입니다. 북한 측은 핵공갈이 먹히고 있다고 판단,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입니다. 핵무기를 정치무기, 더 나아가서 통일의 무기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한미동맹이 해체되거나 약화된 뒤라면 우리로선 감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미국 부통령은 철학적 논평을 하였다.
“토라스 칼라일이 ‘영웅숭배론’의 서문에서 한 말이 기억나는 군요. 인간은 역경(逆境)을 이기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된다고 썼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풍요하니 비겁해지는 면이 있죠.”
부통령은 중국 역사를 전공한 학자 출신인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김정은이 이번에 쓴 수법은 동양에선 전례(前例)가 있지요. 남송(南宋)에 대하여 금(金)나라가 썼던 전술입니다.”

한국 대통령은 한국군 장교들의 애독서인 《宋의 눈물》에서 읽었던 유명한 악비(岳飛)의 고사(故事)를 기억에서 되살려 보았다.

<1140년과 이듬해 금군(金軍)은 올출 장군의 지휘 하에 남송(南宋)을 치기 위하여 남하했다. 이때 남송군(南宋軍)은 여러 방면에서 금군을 격파했는데 그때마다 간신 진회(秦檜)가 남송의 고종에게 아뢰어 이기고 있는 남송군을 철퇴시키고 승장(勝將)을 좌천시키거나 파면했다. 올출은 진회를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
  “강경론자 岳飛(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진회는 남송의 충신 악비 부자(父子)를 역모로 몰아 죽였다.
  1206년 남송의 영종 시절 주전론(主戰論)의 대표인 한탁주는 금을 쳤으나 대패했다. 금은 이의 책임을 물어 영종에게 한탁주의 목을 요구했다. 송조(宋朝)는 그를 암살한 뒤 머리를 상자에 넣어 금에 보냈다. 금은 한탁주를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한국 대통령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미국 부통령을 향하여 말하였다.
“오늘 부통령을 통하여 미국 대통령의 뜻을 잘 전해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답변은 내일 하겠습니다. 한 번 더 만납시다.”
일어서는 부통령의 두툼한 손을 잡은 대통령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을 소외시키고 중국이나 북한과 빅딜을 하겠다면 제2의 에치슨 라인을 긋겠다는 뜻인가요? 당시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다른데 말입니다. 한국은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며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세계 일곱 나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부통령은 이 말에 함축된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한 방 맞은 듯 머뭇하다가 “그 질문에 관한 답은 내일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자유의 代價는 항상 비싼 법입니다’

그날 밤 대통령은 불면(不眠)의 밤을 보냈다. 대한민국이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존립할 수 있느냐가 자신에게 달려 있고, 그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사안이란 점에서 정상(頂上)의 고독은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였다.
수년 전 신문에 났던 ‘핵 없는 대한민국, 북한의 인질 된다’는 투박한 구호가 현실이 되었는데 한국이 쓸 수 있는 대응 수단은 한국인에 의하여 소멸되어 있었다. 핵무기 개발 능력은 충분하였지만, 사드 등 종합적 핵미사일 방어체제를 건설할 돈도 많았지만, 미국과 일체가 될 정도로 한미동맹을 강화할 시간도 있었지만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무조건적(그러면서도 투쟁적) 평화주의가 한때 위대하였던 국민들을 타락시키고 이 나라를 발가벗겨놓은 사실을 깨달았다. 핵도 없고, 방어망도 없고, 결사항전의 의지도 없는, 살찐 돼지 같은 나라는 굶주린 늑대 같은 북한에 먹히는 게 정의(正義)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한민국도 남송(南宋)처럼 세계사에 자주 등장하는, 배고픈 나라에 먹힌 배부른 나라의 하나로 기록될 것인가?

그날 밤, 그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럴 수는 없다는 다짐도 해보았다. 한국인은 당대의 최강국과 맞섰던 기록이 있다. 수와 당을 저지한 고구려, 대당(對唐)결전으로 한반도를 민족사의 보금자리로 확보한 신라, 몽골 침략에 40년 동안 버틴 고려, 세계최강의 육군을 패퇴시킨 임진왜란, 소련과 중공의 사주를 받은 북한군의 기습 남침을 저지, 냉전에서 자유세계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던 이승만과 국군. 한민족(韓民族)의 DNA(유전자)가 된, 군관민(軍官民) 일체의 결사항전(決死抗戰) 전통, 그 불꽃을 살릴 수는 없을까?

문득 대통령의 머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몇 달 전 국민안전처가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합참 차장 출신인 처장이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전국의 지하시설을 전수 조사하였습니다. 그동안의 개발 붐으로 지하도, 지하철, 지하실 등이 어머 어마 합니다. 스위스가 全 국민의 120%를 수용할 핵방공호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도 못지않습니다. 이 지하시설을 유사시 핵방공호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적의 핵공격 제1파를 최소한의 희생으로 견디고, 세컨드 스트라이크 캐퍼빌리티(second strike capability)를 온존시킬 수 있습니다.”

제1파의 핵공격으로 30만 명이 죽어도 4900만 명은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휴대전화로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를 해안 봉쇄할 때의 연설문을 검색해보았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선택한 길은 어렵고도 위험한 길임이 분명합니다. 이 길이 어디로 갈지, 얼마나 많은 대가(代價)와 희생을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항상 비싼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항복하거나 굴복하는 길입니다.’
대통령은 미국 특사를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이 문장을 꼭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청와대의 창밖으로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왜 박정희의 핵개발을 막았습니까?'

  다음날 오전 청와대 접견실에서 한국 대통령은 특사로 온 미국 부통령을 다시 마주 하였다. 한국 측 통역과 안보실장, 그리고 주한미국 대사가 배석하였다. 의례적인 인사를 끝낸 뒤 대통령이 먼저 입을 뗐다.
  '어제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야기를 좀 길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는 특사께서 한국 정부의 과거 행태를 비판적으로 지적해주셨습니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특사께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1976년 무렵 박정희 정부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였습니다. 미군이 월남전에서 패배, 김일성이 남침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고 무기용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기 쉬운 중수로를 캐나다로부터 수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1974년 인도가 캐나다에서 들여온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 핵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미국은 비로소 한국에 눈을 돌렸습니다. 미 정보기관은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였다고 판단, 미국 정부가 나서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지요. 포드 대통령, 키신저 국무장관, 슐레진저 국방장관이 움직였습니다. 全方位 압박이 주효하여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 도입은 좌절되었습니다. 미국 측은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한미동맹의 무효화까지 고려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해왔습니다. 특히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미국 회사가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朴 대통령은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핵무장을 당시 소련이나 중공이 막은 게 아닙니다. 미국이 동맹국의 핵무장을 막은 것입니다.
똑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지금 북한의 핵무장은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막아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 이사국에 속하여 세계의 질서를 관리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깡패국가에 휘둘려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포기할 때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한국에 핵우산 제공을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함으로써 이 우산은 반쯤 찢어졌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저는 미국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합니다. 한국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할 때 미국이 약속하였던 점들을 준수하고 동시에 중국에 이런 통보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을 막았듯이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로서는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막을 논리를 상실한다'고 말입니다.' '

여기서 대통령은 잠시 발언을 멈추었다. 이 틈을 타고 미국 특사가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고 하였다.
'각하가 박정희를 언급하시니 놀랐습니다. 그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신 줄 압니다만...'
한국 대통령은 씩 웃더니, '그렇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앉으니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라고 했다.

  '역사와 마주하는 입장에 서니 내가 싫어하였던 박 대통령의 많은 부분이 이해되는군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의 역사학자들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 납니다. 대통령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 傳記를 쓴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그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옳은 관찰입니다. 부통령인 저도 미국 대통령의 고민과 그 자리가 주는 중압감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학자들의 대통령 이야기가 대체로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후통첩

대통령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특사, 솔직히 말합시다. 북한의 핵무기는 중국에 더 위협적인 것 아닙니까. 북경 등 심장부를 겨누고 있지 않습니까. 왜 미국은 이 점을 짚지 않습니까. 왜 중국에 부탁만 합니까.'

대통령은 특사의 표정을 읽으면서 덧붙였다.

'우리 정보로는 김정은이 방북한 미국 밀사에게 앞으로 美北이 수교하면 북한은 親美 국가가 될 것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를 했다는데 맞습니까?'

'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부통령은 대통령이 아는 것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자필 메모장을 넘기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음은 부시 정부의 실수를 짚어야겠습니다. 2005년 마카오의 방코델타은행에 있는 북한계좌를 불법 자금 세탁용이라고 규정, 미국 재부무가 나서서 동결시킨 이후의 사태 전개 말입니다.'

  대통령은 미국이 금융제재로 김정일을 코너로 몰았다가 핵실험을 하니 당황하여 라이스와 힐 팀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섰다가 노련한 김계관에게 당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였다. 2007년 9월 북한이 시리아에 지어주던 핵폭탄 개발용 원자로를 이스라엘이 폭격한 뒤에도 부시 행정부가 핵확산 범죄를 저지른 북한을 응징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점도 잊지 않고 지적하였다.

'특사께선, 이렇게 과거사를 따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건 좋습니다. 우리만 실수한 게 아니라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싶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한국 대통령은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뗐다.

'나는 미국 대통령에게 제의합니다. 첫째, 대한민국을 뺀 회담에서 결정되는 한반도에 관한 그 어떤 합의사항도 우리는 준수할 의무를 지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NPT에서 탈퇴하는 문제도 고려할 것입니다. 셋째, 자위적 핵무장에 대하여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입니다. 넷째, 평화협정은 북핵이 완전히 폐기된 뒤 韓國戰 당사자인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사이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미북이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미국 부통령이 긴장한 자세를 취했다.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으더니 물었다.

'NPT에서 탈퇴한다고요?'

  '탈퇴를 고려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앞으로 미국의 태도나 북한의 위협의 방향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NPT 10조가 핵문제로 인하여 국가 생존 차원의 문제가 생길 경우 탈퇴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 특사도 잘 아시지요?'

   '그렇다면 IAEA 사찰도 받지 않겠다는 거군요. 스물 네 개나 되는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하여.'

   '한반도의 핵게임은 그동안 불공정하였습니다. 심판을 봐야 할 미국과 중국이 반칙만 하는 북한에 대하여는 퇴장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규칙을 잘 지키는 한국만 손발을 묶어놓으니 판을 깨야 산다는 결론이 이르렀습니다. 물론 내일 당장 탈퇴하는 게 아니지요. 1년 정도 時限을 주려고 합니다. 그 기간 안에 유엔 안보리나 6자 회담이 북한의 핵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탈퇴한다고 예고를 할 생각입니다.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물어 투표로써 국가적 의지로 확정지을 작정입니다.'

'한미 동맹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임은 自明합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세계 5대 공업국이고 6대 수출국인 한국이 한미동맹에서 이탈하면 자의반타의반으로 중국 영향권에 들어갈 것임은 미국 지도부도 잘 아시겠지요? 특히 중국 전문가인 특사께서는.'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데 말입니다. 한미동맹이 사라지면 좌파세력도 정신을 차리고는 핵무장을 하자고 할지 모릅니다'라고 했다.

  '내가 박정희 전기를 읽어보니 그는 학생 시위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주한미군이 있는 한 시위는 없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했더군요. 주한미군만 믿고 나라야 어떻게 되든 안보야 어떻게 되든 데모를 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정치적 결단




'대통령 각하, 우리는 한국의 핵무장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월성의 중수로와 첨단 과학기술력을 이용하면 단기간에 핵실험을 하지 않고도  수소 폭탄을 바로 만들 수 있다는 평가서를 저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핵우산을 정말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미국부터 북한의 핵공갈에 넘어가 이렇게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나오니 우산은 찢어진 것 아닙니까?'

'찢어져도 수선하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슬쩍 카드를 하나 내어놓았다.

'그렇다면 핵우산 약속을 구체화시킬 수 있습니까? 김정은이 알아 먹도록.'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귀국하여 대통령에게 충실히 전하겠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이 순간을 위하여 오래 생각한 듯 특사가 받아 적도록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철수한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고 한미연합사의 통제 아래 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戰時에는 한국과 미국이 공동 관리하게 되는 거지요. NATO에도 같은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둘째, 핵미사일을 탑재한 미국의 잠수함을  한국 근해에 常時 배치하는 것입니다. 셋째, 북한의 핵위협에 노출된 한국 미국 일본의 頂上이 만나 공동선언을 하는 겁니다. 쿠바 미사일 사건 때 케네디 대통령이 한 연설 속에 들어 있는 문장이면 되겠습니다. '북한이 우리 세 나라 중 어느 나라를 핵공격한다면 우리 세 나라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보복하겠다'는 문장이면 족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김정은이도 신중해지지 않을까요?'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면 반미 시위가 일어날 텐데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럴 겁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제가 해결할 일입니다. 과거와는 다를 겁니다.'

  대통령은 갑자기 미국 특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건 정치로 풀어야 합니다. 클레망소기 이야기하였지 않습니까?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기기엔 너무나 큰 일이라고.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기대합니다.'

  '세 가지 제안을 미국 대통령이 받아들이면 NPT 탈퇴 건과 국민투표 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NPT 탈퇴를 고려한다고 했으니 상황의 전개를 봐가면서 결정하지요. 국민투표는 할 생각입니다. 핵무장 선택권을 걸고 할 것인지 거국적 방어망 건설을 걸고 할 것인지는 미국 측의 반응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북한의 요구는 거부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음 주 전국적으로 핵민방위 훈련을 할 겁니다. 우리가 알아 보니 전국의 지하시설을 이용하면 국민의 140%를 임시로 대피시켜 수용할 수 있다는군요. 북한이 알도록 텔레비전 중계로 훈련 장면을 보여줄 겁니다. 한국에 있는 간첩들도 열심히 보고할 겁니다. 국민들도 달라질 것입니다. 한국인들 속담에 '죽어봐야 죽는 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벼랑에 서 봐야 정신을 차리는 민족입니다. 핵공격으로 100만 명이 죽어도 4900만 명이 살아 남아 싸울 겁니다.'

대통령은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한 장 꺼내더니 미국 부통령(특사)에게 미소를 던졌다.

'국민투표 실시에 즈음한 對국민 연설문에 넣을 문장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선택한 길은 어렵고도 위험한 길임이 분명합니다. 이 길이 어디로 갈지, 얼마나 많은 대가(代價)와 희생을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항상 비싼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항복하거나 굴복하는 길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知的 재산권 침해인데요.'

두 사람은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웃었다. 대통령은 그 순간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을 실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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