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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김일성 발언 "불원간 핵을 보유할 수 있다"
2017년 11월26일  
북핵문제가 국제문제로 공론화된 시점은 영변 핵시설에 대해 미국이 의구심을 가진 1980년대부터지만 북한이 핵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직후인 1950년대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을 잡은 후 소련의 기술원조를 받아 북한 지역에 우라늄 광맥탐사를 실시하여 1947년부터 1950년 6월 6.25전쟁 시작 직전까지 약 9000톤의 우라늄을 채굴하여 소련에 반출했을 정도로 핵무기에 관심을 보였다.

전쟁 중 미국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에 공포를 느낀 김일성은 휴전 후 2년도 채 못 된 1955년 4월 북한 과학원 제2차 총회에서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으며, 1956년 3월26일 소련의 드브나 다국적 핵연구소 창설시 참여하기 위해서 소련과 핵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김일성은 북한의 핵관련 기술자 30여 명을 연수차 소련으로 보내고, 이때 북한에 ‘방사화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1964년 중국의 원폭실험에 자극받은 김일성은 영변 원자력연구소에 기술진 보강하고 연구를 독려했다.

이듬해인 1965년 IRT-2000 연구용 원자로가 가동되어 최초의 핵분열 실험을 실시하게 됐다. 김일성은 1965년 10월 노동당 집회에서 “불원간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1967년 군 지휘관 회의에서 “우리도 원자탄을 생산하게 됐다.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하면 우리도 사용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는 기록도 있다. 1970년 당시 북한 부총리였던 박성철은 북한을 방문한 일본 사회과학 대표단에게 “1972년까지 원폭 제조에 노력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캐나다의 핵전무인 김경하 박사를 입북시켜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은 1974년 9월 IAEA에 공식적으로 가입하고, 같은 해 12월 IAEA 극동지역 대표  이사국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1974년 5월의 인도 핵실험의 성공과 관계가 깊었다.

인도의 핵실험 성공으로 평화적인 이용을 위한 핵시설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IAEA를 통해 쉽게 서방 선진국들의 핵기술을 획득하려 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77년 7월20일 IAEA와 INFCIRC/66 협정에 서명하고, 0.1메가와트 임계로와 IRT 원자로를 IAEA의 감시 하에 두면서 핵개발을 추진했다.

1975년 중반까지 북한은 30메가와트 흑연 감속 재원자로의 건설을 포함한 원자력 시설의 확대 계획을 시작하고, 1976년에는 영변의 핵폐기물 저장소를 건설하여 프랑스로부터 IRIS-50컴퓨터 2대를 도입했다. 여기에다 북한은 소련에서 도입한 영변 기지의 IRT-2000 원자로 등을 가동하여 획득한 중요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원자로를 제작했다.

1980년이 되면서 IRT-2000 연구용 원자로에서 기술을 축적한 북한은 1980년 7월 자체 기술로 5메가와트 원자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86년 완공·가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프랑스의 인공위성 ‘SPOT’가 영변 핵시설을 촬영(1986년 6월) 공개함으로써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 원자로에서 연소된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재처리 생산하는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을 5메가와트 원자로가 가동되기 1년 전(1985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989년부터는 제한된 가동상태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북한은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생산했으며 핵기폭장치 실험을 병행했다. 북한은 구소련의 요청을 받아들여 1985년 12월에 NPT에 가입하는 대신에 소련과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관한 원조 협정을 체결하고, 소련으로부터 44메가와트급 상업용 원자로 4기를 제공받았다.

이어 1986년 12월 소련과 핵기술 협정이 체결되면서 김일성은 과학기술의 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정무원 내에 원자력공업부를 신설하고, 최학근을 초대부장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하여 북한의 원자력 개발이 내각차원의 사업으로 책정되고, 원자력공업부는 원자력 관련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1991년 9월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 철수를 선언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남한이 핵개발을 하지 않으면 북한도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라 믿고, 남북비핵화공동선언(1991년 12월31일)을 하기에 이르렀다. 북한도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한반도에 비핵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북한은 항공기 탑재가 가능한 플루토늄형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었다고 미 국방성은 뒤늦게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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