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동본부 - nac.or.kr

김정은이 월남식 평화협정 공세로 나올 때
趙甲濟
2018년 04월20일  
문재인 정권이 호응하면 대한민국 국민은 결단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朴正熙의 예언
  
   1973년 노벨평화상은 美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越盟의 정치국원 레둑토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평화협상 때 양국을 대표해 베트남戰의 휴전문제를 놓고 3년간 협상한 관계였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키신저와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1년 반 뒤 베트남의 평화협정은 월맹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깨지고 베트남은 공산화 통일되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도 모르고,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생리도 모르는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두 사람에 대해 알프레드 노벨의 이상을 구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차라리 코미디이다.
  
   두 사람은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레둑토는 미국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키신저는 수상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反戰 시위대의 출현을 겁내 수상식엔 불참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키신저와 레둑토가 합의한 베트남 휴전 협상안을 미리 읽어 본 朴正熙 대통령은 柳陽洙 駐越대사에게 『이런 문안에 합의하면 베트남은 1년 안으로 공산화된다』면서 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충고해 주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柳陽洙 대사에게 티우 대통령은, 자신도 朴대통령과 동감이라면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 키신저와 레둑토는 越南 정부를 빼돌리고 越南 국민의 운명을 결정할 비밀협상을 진행해 왔는데 그 협상안이란 것이 가관이었다.
  
  
   버림받은 越南
  
   그때 17도선 이남의 南베트남 땅에는 약 14만 명의 월맹 정규군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南베트남 출신의 베트콩을 지휘하고 있었다. 越南 정부를 따돌리고 미국과 월맹이 합의한 휴전안에 따르면 이 월맹군의 現 위치 주둔을 허용하면서 駐越미군의 全面 철수를 규정했다.
  
   더구나 越南에 세워질 연립정부는 越南과 월맹, 베트콩 3者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연립정부는 공산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정부가 될 것임을 티우 대통령도 간파했다. 티우 대통령에게 이 휴전안을 수용하도록 강요한 것은 키신저였다. 그는 재선된 닉슨 대통령이 취임식을 갖기 전에 베트남평화협정을 발효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티우 대통령이 요구한 보장책으로서 미국은 닉슨 대통령이 『월맹이 휴전협정을 깰 때는 미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때웠다. 그 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미국 의회가 越南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동결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越南은 버림받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5년 봄 월맹은 정규군을 앞세운 남침으로써 베트남을 적화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 그는 베트남에 있던 미국인들과 베트남인 협조자들을 사이공 함락 전에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로 「월맹 측에게 잘 이야기하여 탄손누트 공항을 포격하지 말도록 부탁해 달라」는 간청까지 했다. 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좀 세워 달라는 당부였다.
  
  
   키신저의 때늦은 후회
  
  
   자신이 합의해 준 평화협정을 미국 측이 지키지 못한 바람에 베트남이 무너져 내리고 있던 그날 키신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1999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인용).
  
   <4월21일 구엔 반 티우 越南 대통령은 미국이 (월맹으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준수하도록 만들지 못했고, 越南에 대한 원조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비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티우가 협상을 통한 결과 도출에 방해물이었다면서, 이제는 파리협정에 의한 해결이 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티우는 미국을 증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나를 미워했다. 내가 베트남에 있어서 미군 개입을 종결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와 명예심으로써 조국을 위해 일한 그를 존경했다.
  
   反戰 운동가들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그는 결코 평화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와 그의 조국은 이런 운명을 맞기엔 억울했다. 내가 만약 가련한 처지가 된 우방국에게 우리 의회가 원조를 중단하는 결의를 할 것이라고 예견했더라면 나는 1972년 마지막 단계의 협상에서 (그에게) 무리한 압력을 넣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후회를 했다>
  
   키신저의 때늦은 후회는 사치라고 하겠다. 그의 판단착오 때문에 越南이 공산화되고 수천만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수십만 명의 보트피플이 동중국海와 남중국海에서 상어의 밥이 될 운명이었으니까. 키신저의 후회는 자신의 양심을 증명하는 것이 될지언정 亡國의 국민들을 달랠 수는 없었다.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越南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內의 소위 평화운동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美 전쟁 의지 약화시킨 평화운동
  
   反기성, 反전통문화의 성격도 띠고 있었던 평화운동은 언론과 의회에 큰 영향을 끼쳐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인도지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기간, 즉 휴전협정 서명 후 1년 반 동안 월맹은 새로이 13만 명의 정규군과 탱크·대포를 17도선 이남으로 침투시켰다. 이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에 대해서 닉슨은 의회의 지원금지 결의로 해서 티우에 대한 약속(휴전협정을 어기면 월맹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편지)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越南에 대한 경제지원도 1973회계연도의 21억 달러에서 다음해에는 10억 달러, 1975년엔 7억 달러로 줄었다. 키신저도 월맹이 휴전협정을 준수할 마음이 없고 휴전기간을 공산화로 가는 과도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국내정치 불안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수단을 동원할 수 없었다. 어떤 외교정책도 국내 정치의 사보타주에 직면하면 실천될 수 없는 것이다.
  
   越南에서 미국이 진 것은 군사력이 약해서도, 경제력이 약해서도 아니다. 전쟁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17도선 이북 월맹에 육군을 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폭격으로 월맹의 전쟁의지를 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敵 군사력의 원천을 온존시키고 월맹의 수족인 베트남內의 월맹 정규군 및 베트콩하고만 싸우는 데 미군을 투입했으니, 미국은 결전을 포기하고 지엽적인 전투에 매달린 셈이다. 이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즉 미국의 전쟁의지를 약화시킨 것이 미국內의 反戰운동·평화운동,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언론과 의회의 제동이었다.
  
  
   1973년의 월남평화협정과 1953년의 한국 휴전협정은 다른 점이 많다.
  
   1. 월남평화협정으로 駐越미군은 철군했는데 월남에 있던 월맹군은 철군하지 않았다.
   2. 남한에서 미군은 남았고, 북한에선 중공군이 철수했다.
   3. 월남에서 17도선은 군사분계선으로 지켜지지 않았으나 휴전선은 지켜졌다. 韓美동맹이 완강했기 때문이다. 월남에선 17도선 관리를 베트콩과 월맹군이 장악했다.
   4. 휴전 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대통령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나 월남에선 티우 정권이 약해졌다.
   5. 월남에선 닉슨 대통령이 월남방어를 空約만 했으나 李承晩은 韓美상호방위조약을 맺어 강제화했다.
   6. 협정 이후 미국은 월남에서 발을 뺐으나 미국은 한국을 더욱 깊게 지원하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은 한국엔 李承晩이 있었고 월남엔 없었다는 점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016년 2월 베이징에서 줄리 비숍 호주 외무장관과 회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비록 한반도 핵 문제는 중국에 (책임이) 있지 않지만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비핵화를 실현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을 동시에 추진하는 협상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추진을 공식 제안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보도되었다. 중국은 북한이 핵 미사일 실험을 동결하면 한미군사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이른바 ‘쌍중단’도 제의하였는데 문 대통령 특보 문정인 씨도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정상적인 평화협정은 전쟁에서 승패(勝敗)가 난 뒤 패전국과 승전국 사이에서 이뤄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평화 협정, 태평양 전쟁 이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정이 좋은 예이다.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평화협정을 맺은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은 성공적이고, 월남 평화협정은 실패작이 되었다. 한반도에선 평화가 정착되기는커녕 北의 핵무장과 핵위협으로 위기가 고조되었는데, 평화협정 이야기가 나온다. 분쟁 그 자체를 해결하지 않고 평화협정을 맺는 것은 원수지간의 남녀(男女)가 화해하지 않고 결혼하는 격이다.
  
   평화가 아니라 재앙을 부르는 평화협정
  
   통일연구원의 최진욱 연구원(당시)은 2007년에 쓴 논문에서 이런 지적을 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대해 단독으로 전쟁선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 의회가 북‧미 평화협정을 비준할 법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는 <평화조약은 신뢰 회복이 선행되어야 하며, 평화조약 당사자 간 신뢰가 형성되기 전에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한국, 미국, 북한, 중국 등 4자 간이든 3자간이든 미북 간이든 일단 평화협정이 논의되기 시작하면 한국은 핵무기가 없기 때문에 소외될 것이다. 핵무장한 세 나라가 핵무장하지 않은 한국을 존중할 리가 없다.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논의 자체를 반대해야 하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지금은 평화협정을 논의할 수 있는 신뢰 구축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구경꾼 입장이 되어 미국과 월맹에 평화협상을 맡겼다가 망한 월남의 사례는 한국에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전쟁 자체를 해결하지 않은 채 맺은 평화협정은 월맹에 의하여 2년 뒤 휴지가 되고 협정 정신을 믿었던 월남은 망하고 수십 만 명의 월남인들은 보트 피플이 되어 남중국해를 떠돌다가 상어 밥이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적의 말을 믿는 자는 삼족을 멸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수미 테리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국담당 보좌관은 지난 해 2월 하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미북 간 평화협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서면 증언에서 “북한은 정전협정을 대체할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평화 기구를 구축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미한(美韓)동맹을 해체시키기 위해 평화협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산정책연구원 이기범 연구위원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논의의 위험성’이란 논문에서 평화협정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제도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월남 공산화의 길을 연 파리 평화협정을 비판한다.
   <남베트남의 소멸을 초래한 1973년 ‘Paris Peace Accords’에는 몇몇 독소조항들이 있었다. 이 조약 제4조23 및 제6조24는 미국이 남베트남에 군대를 주둔시킬 근거를 상실시켰다. 그리고 제9조25는 남베트남에서의 ‘민족자결권(people's right to self-determination)’ 행사를 강조함으로써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병합되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즉, 미국이 철군한 상황에서 1973년 ‘Paris Peace Accords’의 민족자결권 개념이 강조되었을 때 남베트남의 병합을 민족자결권 행사로 호도할 수 있었다.>
  
   1953년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된다면 이 평화협정에 북한의 핵 개발 포기 또는 한반도 비핵화가 명시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주한미군 철수 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민족자결권 존중 등이 포함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남한 공산화를 민족문제로 공식화하여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독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범 연구위원은 북한이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라고 본다. 북한의 핵 문제는 북한이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 對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 對 북한의 문제이며, 북한은 국제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인 핵 포기를 대가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의 핵 포기와 주한미군 철수 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를 맞바꾼다면 북한의 불법행위를 대한민국 해체로 보상해주는 형식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가연합 혹은 낮은단계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헌법 위반인데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 위헌적 통일방안이 끼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00년 6월 평양회담에서 김대중, 김정일은 ‘주한미군의 중립화’에 공감하였는데 이는 한미동맹 해체의 다른 말이다. 평화협정 논의에 북핵 폐기, 주한미군 중립화, 중립화 통일이 한 세트로 거론될지도 모른다.
   중국-북한-한국의 좌파 세력이 주도하는 중립화 통일 논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진로를 동시에 바꿀 것이다. 북핵 위기는 종결 단계에서 대한민국의 좌표를 해양문화권에서 대륙권으로 옮겨놓을지 모른다.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은 해양문화권의 자유진영 편에 섰기에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동서양의 국가적 자살 사례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1. 敵을 앞에 두고도 위선적 평화론이 득세한다. 이 평화론은 내부 분열을 재촉하여 자주국방 의지를 무너뜨린다(1930년대 프랑스, 南베트남).
  
   2. 外敵의 조종을 받는 「내부의 敵」이 집권하거나 득세한다(南베트남).
  
   3. 집권세력이 「내부의 敵」을 막지 못하거나 잇단 정책 착오를 일으켜 기존의 동맹관계가 무너지거나 약화된다(南베트남, 宋).
  
   4. 내부의 계급적 분열로 내전 또는 내전적 상태가 조성되며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외세가 개입하거나 외세를 불러들이려 한다(조선조, 프랑스, 南베트남).
  
   5. 체제수호 세력이 단결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南베트남, 조선조, 프랑스).
  
  
   세계사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가 자살하는 사례는 집권세력이 내부의 敵을 막지 못한 경우, 내부분열이 외세를 불러들인 경우, 동맹관계가 무너진 경우, 敵前평화운동이 자주국방과 체제수호 의지를 무력화시킨 경우이다.
  
   문재인 정권은 김정은의 월남식 평화협정 공세를 저지하지 않고 오히려 호응,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민들에게 생존차원의 결단을 강요하게 될 것다.


문재인 정권의 국가 해체: 國體, 國民, 國軍, 國法, 國益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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