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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의 韓國戰 참전자들이 행복한 이유
趙甲濟
2018년 06월07일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더타임스> 등 여러 언론기관에 기사를 쓰는 앤드루 새먼 기자는 英聯邦(영연방) 글로스터大隊(대대)의 決死抗戰(결사항전)을 다룬 《마지막 한 발까지》라는 책을 썼다. 그는, 1951년 4월 하순 중공군의 대공세로 포위당한 영연방軍의 영웅적 전투(설마리 전투)를 취재하며 여러 생존 참전자들을 만났다. 상당수는 전란 중의 한국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다시 찾은 참전자들은 달라졌다.
   책의 한 대목이다.
   〈그들은 새롭고, 용감한 나라 한국을 발견한 것이다. 유엔군이 흘린 피값은 미국의 돈으로 보증되고 한국인의 땀으로 상환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무역과 기술이전에 특혜를 받은 데다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고, 유일한 자원이자 발전의 지렛대인 사람에 투자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올림픽을 열기 전해엔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민주화까지 이뤘다. 오늘의 한국이 누리는 생활수준과 개인의 자유는 유럽의 중급 정도가 된다.〉
   2001년 글로스터 대대 전투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참전자 일행은 전쟁기념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의장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 환영 행사에 잘못 온 게 아닌가’하는 착각을 했다고 한다. 한 참전자는 “한국이 이런 나라가 되다니, 하느님, 맙소사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허리띠가 고장 나서 상점에 들어갔더니 주인은 새 허리띠를 주면서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싸웠잖아요. 작은 선물입니다.”>
   새먼 기자는 ‘zero to hero’란 표현을 쓰면서 한국처럼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그야말로 제로 상태에서 일어나 영웅적 나라를 만든 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국가적 성공 사례라고 주장했다. 헨리 울프스라는 영국군 참전자는 이 책(《마지막 한 발까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본다면 자유가 공짜가 아니란 말이 맞다. 반세기가 흘러서 뒤돌아보니 ‘잊혀진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존 프레스턴 벨 씨는 著者(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의 공통점이 뭘까요?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거예요. 50년 전 나는 내 생명의 1년을 주었습니다.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지요.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준 그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감사를 받고는, 그리고 그들이 만든 완전히 새롭고 멋진, 유쾌한, 평등하고, 야심만만하며, 번영하는 새 나라를 만든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이는 당신들입니다.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키워 준 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새먼 기자는 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저서를 끝냈다.
  
  
  
  미국의 유명한 수사식 보도 전문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탐이 쓴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는 한국전을 다룬 大作이다. 핼버스탐은 뉴욕타임스의 사이공 특파원 시절 월남전을 수행하는 미국과 월남정부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보도하여 퓰리처상도 받고 유명해졌다. 그가 쓴 '최고의 엘리트들(The Best and Brightest)'은 케네디, 존슨 행정부의 엘리트 관료들이 어떻게 월남전을 誤判(오판)했는가를 추적한 걸작이다.
   그는 2008년 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그 직전에 완성한 것이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비판적으로 다뤘던 그는 韓國戰에 참여한 미군과 한국군의 역할을 호의적으로 그렸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미군들이 좌절하고 실망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고 썼다. 전쟁이 미군의 승리가 아니라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한국전 참전은 자랑스런 과거가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로 치부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렀다. 잊어버리고싶은 전쟁이란 뜻이다.
   冷戰(냉전)에서 서방세계가 이긴 후 한국전의 역사적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도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의 발전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은 대체로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분뇨 냄새 나고, 춥고 더웠던 전선의 기억에다가 절망적인 나라 꼴이 한국을 뒤돌아보기 싫은 나라로 만들었다. 그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민주화까지 되더니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반면 북한은 전쟁 때보다 더 못 살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우리가 피를 흘려 자유를 지켜준 덕분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의 발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老年의 참전용사들은 한국으로 관광을 많이 온다. 낙동강 戰線, 휴전선, 판문점을 둘러 보곤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그들이 만난 한국인들은 미군에 감사했다. 미국에서 받아보지 못한 환영을 한국에서 받았다. 이런 소문이 미국에 전해지자 더 많은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쓰레기더미 같았던 부산과 서울이 세계적 대도시로 바뀌고 거지 같았던 한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더 오래 사는 신사 숙녀로 바뀌었다.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이런 한국의 성공에 자신들의 기여가 있었다고 자부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5만명의 전사자, 10만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 희생으로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는데, 한국에 와 보고는 희생의 결과물이 번영하는 자유의 나라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핼버스탐은 '가장 추운 겨울'에서 한국의 성공은, 유럽을 살린 마셜플랜을 능가하는 트루먼의 업적이었다고 칭송했다. 한국인의 성공 덕분에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국의 反美운동 때문에 갖지 않을 수 없었던 미안한 생각이 다소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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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강타자 테드 윌리엄즈가 83세에 죽었을 때 뉴욕 타임즈는 그에 대한 추모 기사를 썼는데 분량이 단편 소설 정도였다. 전현직 대통령이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곤 가장 긴 추모기사가 아닐까.
  
  테드 윌리엄즈는 일부 評者들 사이에서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능가하는 미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강타자로 꼽힌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그는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만 외야수로 뛰었다. 1960년9월28일 그는 은퇴 게임의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때렸다. 통산 521개째. 환호하는 관중에게 인사도 없이 그는 더그 아웃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관중들이 앵콜을 요청하듯 환호를 보내고 동료들과 심판까지도 나와서 인사하라고 했지만 윌리엄즈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명한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이 광경을 지켜본 뒤 쓴 글에서 하느님은 편지에 답장을 안하신다라고 했다.
  
  테드 윌리엄즈는 자존심이 대단히 강했다. 그는 팬들과 기자들의 비판에 마음이 상해 新人 시절부터 하나의 행동원칙을 세웠다. 홈런을 쳤을 때 아무리 팬들이 박수를 보내도 모자를 벗어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 지켰다.
  
  메이저 리그 야구사에서 그는 마지막 4할 타자로 남아 있다. 1941년 마지막 더블헤더에 들어가기 전 그의 타율은 0.39955였다. 반올림하여 4할 타자로 인정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감독은 윌리엄즈에게 출전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이 두 게임에서 그는 8타석 6안타를 기록하여 그의 타율을 4할6리로 끌어올렸다. 그의 앞에 마지막으로 4할을 친 타자는 뉴욕 자이언트의 빌 테리였다. 1930년 시즌.
  
  그의 통산 타율은 3할4분4리로서 역대 6위이지만 1941년 이후의 선수중에서는 최고이다. 그는 나이가 먹어가면서도 高타율을 유지했다. 은퇴 전해인 1959년에 딱 한번 3할을 밑돌았다. 그는 베이브 루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년에는 내가 아마도 역대 최고의 타자였을 것이다]고 우회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아메리컨 리그에서 장타율에서 여덟번, 타율에서 여섯 번, 타점과 홈런 부문에서 각 네번, 득점에서 여섯 번, 그리고 四球에서 여덟 번 1등을 차지했다. 두번이나 그는 타점, 홈런, 타율에서 모두 1위를 차지(삼관왕)하였다.
  
  테드 윌리엄스의 경이적인 타격, 그 비결은 그의 視力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투수가 던진 공의 실밥을 볼 줄 알았다는 말도 있다. 홈 플레이트가 몇 밀리 잘못 놓인 것을 지적했는데 정밀 측량을 했더니 지적 대로였다는 것이다. 그 자신은 좋은 視力에다가 집중력을 꼽았다.
  
  그는 오른손잡이였는데 맨 처음 배터를 쥐었을 때 왼쪽으로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타격만 왼손으로 했다고 한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타격을 하면 장타력에서 손해를 본다.
  
  
  테드 윌리엄즈는 2차 세계대전이 났을 때 3년간 군대에 복무했다. 해군에 들어가 미국 본토에서 조종사 교관으로 근무했던 것이다. 6.25 남침으로 한국전선에 미군이 파병되자 그는 다시 소집되어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2년간 싸웠다. 그는 한국 전선에 39회의 출격을 감행했다. 그의 전투기가 피격당해 九死一生의 비상착륙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조종석 옆에서 근무했던 사람이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존 그렌(뒤에 상원의원)이었다. 전성기 약 5년간의 이 공백이 없었더라면 그는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포함한 거의 모든 타격 기록을 다 깨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테드 윌리엄즈는 올스타전에서는 드라마틱한 타격을 보였으나 단 한번의 월드 시리즈 출전에선 홈런 없이 2할5분의 타율에 그쳤고 우승도 하지 못했다. 은퇴 후 그는 낚시에 탐닉했다. 낚시의 大家가 되어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 말에 지금의 아메리컨 리그 텍사스 레인저스의 전신인 워싱턴 세네터즈 팀의 감독이 되어 4할2분9리의 승률을 남겼다.
  
  보스턴에는 [테드 윌리엄즈 터널]로 이름붙여진 해저 터널이 있다. 1995년12월에 있었던 봉정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디를 가나 환호를 해주고 편지를 보내주는데 이런 일은 죽을 때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일이 아닌가. 오늘 여기서 분명히 밝혀두지만 나는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이다."
  
  그는 그 뒤 심장 발작으로 여러 번 수술을 받고 인공심장까지 달아야 했다. 1999년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에서 있었던 올스타 게임에 부축을 받고 나온 그는 始球를 던졌다. 이때 처음으로 그는 환호하는 보스턴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고 한다. 은퇴한 이후 39년만의 화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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