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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의원,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왜곡을 비판한다."
2019년 05월31일  
  문 대통령의 말대로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했기 때문에 광주에서 큰 희생이 났던 것인가. 그럼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아무런 희생도 없었을 것인가? 그리고 서울역 시위의 해산이 배신인가? 역사에 가정은 없다.
  
  
  
  문 대통령은 올해 5.18. 기념사를 준비하면서 “내가 광주 5ㆍ18의 발단이 된 서울역 회군 때 그 자리에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그에 앞서 기고문 ‘평범함의 위대함’에서는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은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우려해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이때 광주의 민주화 요구는 더 활활 불타올랐습니다.”라고 썼다. 이보다 앞서 문 대통령은 2011년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 5·18 광주항쟁에서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는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1980년대 중후반 극단적인 진보세력의 ‘서울역 회군 때문에 광주 참사가 생겼다’는 식의 근거없는 낙인찍기로 시대의 아픔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역사왜곡이 대통령을 통해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이 유감이다. 또한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10만 학생들의 열정과 희생을 ‘배신’으로 폄훼하는 발언이다.
  
  
  
  역사적 진실은, 우리 학생대군은 패잔병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해산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TV, 라디오 생중계 기자회견‘를 얻어냈고 앞으로 이어질 민주화 시위를 위한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린다는 기대감을 갖고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진행되다가 5.17. 저녁 계엄군에 의해 서울의 봄이 중단된 것이었다.
  
  
  
  서울역 시위의 해산 배경
  
  
  
  1980.5.15. 오후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 수는 10만 명이었다고 일컬어진다. 애당초 가두시위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5.10 전국 85개 대학 총학장이 가두시위를 하면 휴교 교치를 할 것을 결의한 다음날 서울대 주최로 서울시내 약 2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에서 신 총리와의 TV 생방송 대담을 제의하고 휴교령이 내리면 싸울 것과 5.16 전국대학대표자회의 소집을 결의했었다. 그런데 5.13. 연세대에서 최초로 교문 밖으로 진출한 후(큰 저항없이 교문돌파 된 것에 신군부의 음모란 시각도 있음.), 5.13. 22:00경부터 서울시내 10여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여 이제 더 이상 교내시위에만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5.13. 고대(7천여명), 건국대(1천여명), 명지대(1천여명) 등 전국 40여개 대학 3만여명이 ‘유신잔당 퇴진’ ‘계엄해제’등을 주장하며 성토대회와 농성을 벌렸고 연대 등 6개 대학생 2천5백여명은 광화문 일대에서 밤 10시까지 야간 시위를 벌였습니다.”(1995.3.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등에 대한 내란, 내란목적 살인 피의자’ 전두환 답변서)
  
  
  
  마침내 5.15. 오후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들을 비롯해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서울역 광장의 학생들은 광화문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남대문 부근의 1차 저지선에 막혀 있었고 광화문, 종로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전경들과 대치가 계속되는 중에 한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곧 남대문 근처에서 신원불상자가 버스를 탈취해 대치 중인 경찰을 덮쳐 현장에서 전투경찰 1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내막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어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점차 밤시간이 다가오자 ‘큰 충돌이 나서 군 투입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우려가 커졌다.
  
  
  
  서울역 시위는 각 대학별 역할 분담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할 지 등 사전에 구체적으로 계획된 시위가 아니다보니 현장 지휘체계는 아예 없었다. 시민들의 지원은 없었고 더구나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핸드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연락이 필요하면 사람이 직접 달려가야 했던 때였다. 어둠은 짙어지고 장비라고는 마이크로버스 위에 달린 마이크 하나뿐인상태에서 사상자 소식은 들려오고 야간의 행동에 대한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 지도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잠실운동장과 용산구 효창운동장에서 군부대가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본 의원한테 전달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의 시위 준비는 매우 허술했다. 시위를 하겠다며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이 확성기라는 기본 장비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로 쪽에 집결한 일부 학교에서는 화염병, 각목 등을 준비해 폭력성을 띄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맨손의 평화적 시위였다.
  
  
  
  김대중씨는 이 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13일 밤에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 학생들은 완전히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김대중,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 도서출판 인동刊, p.116) 교내시위에만 머물던 시위방식이 13일 연세대부터 시작하여 가두시위로 바뀌었지만 시민들은 학생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에 대해 아직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또한 이해찬씨의 “14일 가두시위를 평가하는데 공통된 의사는 시민들 반응이 나쁘고 교통장애가 심하여 운전수들 불평이 심하여 우리들이 왜 데모하는지를 잘 모르더라. 따라서 15일까지만 가두시위를 하고 일단 중지하는게 좋다.”(이해찬 합수부 진술서 000429쪽)는 평가는 그 한 예이다.
  
  
  
  훗날 확인된 것이지만 5.15. 당일 시위대를 향한 군부대의 이동 배치는 사실이었다.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발표한 5·18진상 조사결과에도 나타나 있듯이 당시 계엄군은 학생 시위대의 진출에 대비해 이미 무장하고 출동 대기상태에 있었다.
  
  
  
  곧, 서울역 시위가 있던 “5월 15일 18:25경 ‘서울역 광장 5킬로 주변에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30단, 33단 병력 670명과 전차 8대, 장갑차 22대가 출동해 대기하고 있었으며, 1군, 2군, 3군 지역 내에 있는 71개 송전국과 중계소에 계엄군 1,067명을 출동시켜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20사단 3개 연대를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출동시켜 대기”해 있었다.(육본작명 제16-80호, 제17-80호)
  
  
  
  육본작명 제12-80호, 제13-80호에 따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출동이 불가피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5.3.에 특전사 9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켰고, 5.7.에는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에 이동시켰으며, 5.8.에는 특전사 11여단을 김포에 이동시켜 대기상태에 두고 있었습니다.(1995.3.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등에 대한 내란, 내란목적 살인 피의자’ 전두환 답변서)
  
  
  
  “5.14.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또한 김종환 내무장관으로부터 시위진압을 위한 계엄군의 출동과 주요 국가시설 경호경비 요청을 받은 5월 14일에는 특전사령관에게 특전사 6개 여단을 긴급사태 진압에 투입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하였고”(작전상황실작성 제0-203호)
  
  
  
  ‘민주화 일정 앞당긴다’는 총리담화 얻어낸 해산
  
  
  
  각 대학으로 사람이 달려가 연락이 닿는 대로 모인 9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회의가 현장에서 급하게 열린 것은 저녁 7시쯤이었다. 회의 장소는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대 속에 끼어 있는 서울대 본부에서 빌려준 마이크로 버스였다.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열린 학생회장단의 회의 주제는 이 자리에서 계속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일단 돌아갈 것인가였다. 논의는 회의 초반 두 갈래로 갈렸으나 난상토론 끝에 결국 야간에 어떤 충돌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고, 야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통제 불가능한 유혈사태가 날 수도 있다는데 모두가 공감했다. 또한 학생들이 시내 진출할 때 시민들이 보여준 반응이 냉랭한 것을 보면 대국민 홍보작업이 좀 더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나는 해산 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박○호와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안○ 그리고 서울대 이수성 교수와 함께 남대문경찰서를 찾아 그곳의 전화를 통해서 내무부장관과 통화해 ‘민주화일정을 앞당긴다는 신총리의 약속과 연행 학생들의 석방, 그리고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받았다. 약속대로 7:50분경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TV, 라디오 생중계 기자회견이 있은 후 8:30분 본 의원은 신총리의 기자회견 사실과 학교로 돌아간 후의 향후 행동 지침은 16일 오후 3시부터 열릴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에서 결정할 것이라는 점을 발표했다.
  
  
  
  해산을 하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본 의원의 발표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함성과 박수로 그러한 결정을 받아드렸었고 곧 이어 마무리 집회를 갖고 그날의 투쟁을 기꺼이 마무리했다. 곧이어 단국대 학생들이 먼저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며 퇴계로를 향하여 광장을 빠져나갔고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등 서대문구에 위치한 대학의 학생들은 염천교를 통하여 광장을 빠져나갔으며 서울대 학생들은 용산쪽을 향하여 시위대열이 움직여 나갔다. 십만대군 학생들이 봄날을 뜨겁게 달군 그 날의 가두시위를 마감하고 광장을 빠져나간 것은 밤 9시를 넘어서였다. 듬직한 어깨들을 맞걸고 학교를 향하여 걸어서 돌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힘찬 발걸음에는 민주화가 앞당겨지리라는 기대가 서려있었다.
  
  
  
  다음날인 5.16. 서울대의 경우 많은 학생들이 유인물을 들고 대국민 홍보전에 나서는 한편 오후 15:00 부터는 이화여대에서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53명이 모여 다음날까지 28시간 연속 회의를 하던 도중 17일 저녁 무렵 계엄군의 급습으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고 말았고 이것이 ‘미완의 서울의 봄’으로 역사에 남았다.
  
  
  
  문 대통령이 서울역 해산을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라고 폄훼한 것은 극히 유감이다. 문대통령은 서울역에서 해산하지 말고 진군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해산하지 않고 야간에 진군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생 시위에 발포하고 비극이 벌어졌던 것을 보면 서울에서는 광주보다 훨씬 더 큰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은 자연스럽다. 또한 서울에서 유혈사태가 생겼으면 광주 참극을 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10만 학우들의 5.15. 서울역 광장시위를 자기 멋대로 왜곡하는 것은 유시민씨도 마찬가지이다. 유시민이 TV프로그램에서 서울역 시위와 관련해 “버스 위에 올라가서 해산하면 안된다고 얘기를 하래요. 그래서 내가 올라가서 그 얘기를 했어요”라고 마치 자신은 해산을 반대했던 것인 양 말했는데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유시민씨와 관련된 거짓말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시위 때 유시민 팬클럽 사이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위를 독려하기 위한 선동 차원에서 좌파들이 군불 때우던 카더라 통신, 곧 유시민은 진군을 주장했고 심재철은 회군을 주장했다는 거짓 선동이 그럴듯하게 각색되어 유포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유시민은 서울역 서울대 시위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거나 결정권을 갖지도 않았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본 의원뿐이었다. 유시민 자신도 합수부 진술서에서 “자신은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중립이었다”, “돌아가자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만일 유시민이 그 시점, 현장에서 진군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면 총학생회장이던 본인과 큰 의견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도 유시민과 충돌은 없었고 학생회 일을 보는 동안에도 유시민은 본인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본 의원의 발표(8시 30분) 후 유일한 마이크시설이 있던 마이크로버스가 출발했고 각 대학별 마감정리 후 10만 대군이 9시경 해산되었던 상황을 비춰보면 진군 연설했다는 개연성은 추호도 없다.
  
  
  
  ‘서울역 해산 때문에 5·18’ 주장은 허구
  
  
  
  김대중씨는 “5.18광주의거가 자신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을 체포했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것을 듣고 광주 시민들이 다음날인 5월18일에 대대적인 저항을 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 즉시 석방’, ‘비상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투쟁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일본NHK취재반 구성, 1999, 도서출판 인동刊, p.119)
  
  
  
  곧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씨조차 광주항쟁이 자신의 체포가 시작이었다는 것이지 서울역 해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정기용 검찰관도 “1980.5.27. 미국에서 귀국 전 뉴욕타임즈를 보았을 때 광주사태가 발발하였는데 김대중씨를 석방하지 않으면 광주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는 취지의 보도를 보고 귀국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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