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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운명을 결정한 트루먼, 마셜, 에치슨, 브레들리의 난상 토론
趙甲濟
2015년 06월17일  
중공군의 대공세 직후 1950년 11월28일 NSC 회의 實況-집중연재(2)/한국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 '맥아더의 음모' 추적.
  
  1996년 1월15일 고려서적에서 펴낸 ‘丁一權회고록’ 304-307페이지에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다. 1950년 10월 말 북진중이던 유엔군 정면에 중공군이 처음으로 나타나 기습하는 바람에 국군이 큰 타격을 받은 직후의 일을 기록한 대목이다.
   <老대통령은 내 보고를 듣고나서 “역시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하고 지극히 태평이었다. 戰局의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하고, “丁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왔습니다. 장군, 그(필자 주: 맥아더를 지칭)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原爆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深謀는 참으로 탁월합니다”하고 격찬해 마지 않았다.>
  
   丁一權 총장에게 李承晩 대통령은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 통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李 대통령의 편지 寫本이었다. 丁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사본의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北進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英佛은 소련 및 중공의 군사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本職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북진을 방해하는 作戰上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英邁(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李대통령이 보여준 또 다른 한통의 편지는 맥아더가 李대통령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本職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어디까지 本職의 전략을 뒷받침해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하지만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原爆도 불사할 것입니다…>
  
   丁一權은 회고록에서 이 맥아더의 편지 날짜까지 기억했다. 1950년 10월13일이었다고 한다.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맥아더 사령관의 회담이 있은 날이 이틀 뒤인 15일이었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은 만주에 약30만 명을 집결시켰지만 압록강을 건너 한국에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개입한다면 대학살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고 보고하였다. 丁一權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 두 통의 私信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확실치 않다. 極秘 중의 極秘였다. 史家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서한만큼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두 통의 편지가 실체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 문서로도, 이화장 문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일권의 말을 간단히 부정할 수도 없다. 기억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편지 내용이 실제 사태 전개와도 합치한다. 맥아더가 李承晩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사실이라면 중공군의 개입 사실을 알고도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을 속였고 그로 인해 한국의 통일이 좌절되고 한국인들은 서울을 다시 잃는 1.4 후퇴로 엄청난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미스터리의 해명은 뒤로 미루고, 일단 이 편지가 사실이라면 맥아더의 대전략은 이렇게 짐작된다.
  
   그는 중공이 소련과 손잡음으로써 아시아의 赤化를 가져올 수 있는 거대한 위협세력이 되었다고 판단, 당시가 중공의 그런 잠재력을 파괴할 수 있는 適期라고 본 것이다. 즉,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은 이루어지니까 좋은 것이고 개입했을 때는 이것을 確戰의 기회로 삼아 중공을 치겠다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이런 거대한 전략이 현지 사령관의 의지대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줄 모르는 그런 擴戰의 결정은 대통령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11월24일 맥아더는 또 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언론이 크리스마스 攻勢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11월 24일 하루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다음날 중공군 30만명의 대반격이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시작되었다. 11월28일, 한국전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이 미8군과 10군단 사이의 텅빈 간극을 뚫고 남하, 한국군 2군단 지역을 돌파, 미8군의 背後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敵軍이 등 뒤에 나타나는 날은 비극의 시작이다.
  
   도쿄 시간으로 11월28일 오후4시45분, 맥아더는 합참에 戰況을 보고하였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은 지 3일이나 지나서였다. 맥아더는 자신의 예상과 빗나간 戰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세계 언론은, 미군과 한국군이 기습을 받아 포위당한 사태를 긴급하게 보도하는 데도 맥아더는 그 귀중한 3일간을 지체하였다.
  
   그의 뒤늦은 보고는, 중공군에 대한 종전의 축소평가를 180도로 뒤집는 내용이었다.
   <중국의 군사력이 대규모로 투입되었고 매시간 증강되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
   그는 자신의 줄기찬 오판에 대한 사과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중공군의 목표는 한국에서 작전중인 유엔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戰力은 선전포고 없는 이 전쟁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맥아더는 또 <지역 사령관의 영역을 넘는 세계적인 고려를 해야 할 사태발전이므로 새로운 지침을 결정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가 생각해둔 '새로운 지침'엔 중국본토 해안 봉쇄, 만주 폭격, 장개석 군대의 투입, 원폭 사용 검토 등이 들어 있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맥아더는 이 전문에서 비로소 중공군의 추정 병력을 20만(실제로는 30만), 북한군의 병력을 5만으로 상향 평가했다.
  
   합참은 맥아더가 건의한 후퇴 작전을 승인하고 평양~원산 선에 저지선을 칠 것을 권고하였다. 맥아더는 이를 거부하였다. 약한 저지선밖에 칠 수 없고, 돌파당할 것이라면서 8군은 부산을 향하여, 10군단은 흥남으로 철수, 재정비하든지 철수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했다. 12월3일, 합참은 트루먼의 허가를 받아 교두보로 물러나서 병력을 보존하라고 지시하였다. 맥아더는 蔣介石이 제안한 대만 군대의 파병을 받아주자고 제안하였는데 합참은 승인을 보류하였다.
  
   맥아더의 急電이 미 합참에 접수된 것은 워싱턴 시간으로 28일 오전 4시46분이었다. 1시간 30분 뒤인 오전 6시15분 브레들리 합참의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각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아주 비관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날 아침 백악관 참모회의에서 트루먼은 “우리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말을 꺼냈다. 회의에는 작가인 존 허시도 배석했다. 그는 뉴요커 잡지에 트루먼 대통령의 近況을 기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허시의 同席을 허가했다. 미국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특혜였다. 허시는 이렇게 썼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볼이 붉어졌다. 흐느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그러나 용기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가는 수밖에 없다.”>
   트루먼 대통령은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급변한 한국사태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한테도 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참전,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 맥아더에 대한 신임 등 모든 결정은 그 자신이 내린 것이었다.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억울한 심정이야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은 누구한테도 발설할 수 없었다.
  
   걱정하던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11월 1일엔 푸에르토 리코 독립 투사 두 명이 백악관으로 들어와 트루먼 대통령이 2층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비원을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도 있었다. 11월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11월보다 더 암울한 12월, 그리고 새해 1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28일 밤 맥아더는 도쿄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워커 8군 사령관과 알몬드 10군단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서부의 미8군과 동부를 맡은 10군단의 후퇴를 승인하였다. 대공세 4일만에 유엔군은 守勢로 전환한 것이다.
  
   11월28일은 毛澤東판 인천상륙작전이었다(중공군이 청천강을 건너 군우리로 진출, 8군의 배후를 친 것을 1940년 5월 나치 독일군의 아르덴느 숲 돌파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전략적 승리였다는 이야기이다). 11월 28일 밤 毛澤東은 흥분했다. 그는 彭德懷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好機가 왔다”라고 했다.
  
   11월28일 오후 3시 백악관의 각료실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가 열렸다. 트루먼 傳記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로프는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電文에서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 蔣介石 군대의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본토 폭격, 擴戰의 권한 등을 요구하였다>고 했는데 나는 그 문서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날 회의록은 공개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브레들리 합참의장이 한국 지도를 준비한 것을 보고는 각료회담이 열리는 4시까지는 설명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첫 발언을 요청하였다. 에치슨은 종일 의회에 나가 있었으므로 한국 상황에 대한 최신 동향을 알지 못한다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브레들리에게 발언을 요청하였다.
  
   합참의장은 전선의 다급한 상황과는 동떨어진 낙관적 분석을 내어놓았다. 그는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 지침을 요구하였으나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서 2~3일내로 내리겠다고 했다. 브레들리는 또 신문과 방송의 중공군 戰力에 대한 보도는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수송의 문제로 해서 중공군이 그렇게 깊숙이 진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분석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 조지 C 마셜 국방장관은 "유엔군이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해야 한다"면서 "한국 문제에서 미국은 단독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고 유엔과 같이 가야 한다"는 취지의 강조를 했다.
   그는 "8000마일이나 떨어진 워싱턴에서 맥아더에 대하여 전술적 지시를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발지 전투에서 전쟁省은 전선 사령관들에게 단 한 마디의 전술적 질문을 한 적이 없다"면서 "중공군의 개입에 대하여 면밀한 관찰을 계속하되 맥아더에게 전술적 계획에 대하여는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페이스 국방차관은 "지금 미국내에서 쓸 수 있는 사단은 제83 공수사단뿐이다"고 상기시켰다.
  
   이때 부통령 알벤 바클리가 나섰다. 그는 이런 자리에선 발언을 삼가던 이였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는 맥아더가 왜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떠벌렸는가, 하고 따지기 시작하였다. 11월24일 대공세에 즈음하여,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이전에 敵을 섬멸하고 미군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한 말을 비판한 것이다. 페이스 육군장관이 "맥아더는 공식적으로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 변호하였지만 로벳 국방차관은 "그의 기자회견 기록에는 분명히 그런 표현이 있다"고 했다. 브레들리는 또 맥아더를 변호한다.
  
   "맥아더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중국을 향하셔 던진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에 오래 머물거나, 만주로 확전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바클리 부통령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발언을 미국인이 듣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트루먼 대통령이 나섰다.
   "그의 발언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밟고 있는 양탄자를 끌어당겨 넘어지도록 해선 안된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맥아더의 명성을 훼손해선 안 됩니다."
  
   그래도 부통령은 화가 풀리지 않는 듯했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사기에요. 여러 가지 의혹을 불러일으킵니다. 내가 의회에 가면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브레들리는, '맥아더가 중공군이 전선의 중앙부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진격한 것 같다'고 하니 부통령이 또 나섰다.
   "그렇다면 왜 수색을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곳에 공산군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까?"
   마셜 장관은 "맥아더는 10만 명 정도의 중공군만 상대한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브레들리 편을 들었다.
  
   부통령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맥아더를 믿을 수 있습니까? 1주일 전에는 10만이라고 한 사람이 지금은 20만이라고 하니. 20만 명이 아니고 30만 명과 싸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중공군이 총공세로 나오면 우리는 전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인과 관료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였지만 부통령 바클리의 직격탄이 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군 30만 명이 들어온 10월 하순 이후 이들의 戰力에 대하여 1만6000명, 3만, 6만, 10만 식으로 축소 평가하여오다가 총공세를 당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도 실제 병력의 67%정도로 축소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敵의 포진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선 대비를 하면서 진격해야 할 터인데, 허점을 노출시키고 안이하게 대처하였다.
   서부전선을 맡은 8군과 동부전선을 맡은 10군단 사이에 80km가 넘는 간극을 허용하고 이 지역에 대한 정찰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역에 숨어 있던 중공군이 튀어나오면서 서부와 동부로 나뉘어 대공세를 편 것인데, 마셜은 그런 것은 지역 사령관이 알아서 할 일이고 워싱턴에선 간섭을 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럼 무책임을 부통령이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부통령의 추궁에 마셜은 "즉답을 드릴 순 없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입하는 식으로 한국에 붙들려 매여선 안 된다"고 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우리가 새로운 증원부대를 한국으로 보낼 순 없지만 손실 인원을 대체할 순 있다"면서 "이미 맥아더 휘하 부대는 30% 정도의 병력 부족 상태이다"고 했다. 누군가가 맥아더가 지휘하는 총병력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자신있게 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콜린스는 "10군단이 고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선을 지킬 수 있다"고 했고, 트루먼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에치슨 장관이 처음으로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세계적 관점에서 한국전을 바라 보아야 한다면서 "중국의 뒤에는 소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우리는 중국이 투입하는 병력만큼 보낼 수 없으므로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미 모든 사태 뒤에 소련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해놓고 소련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적으로 평판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소련이 만든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만주를 폭격할 일이 있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엔 성공하겠지만 소련은 즐겁게 대응할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투입할수록 그들은 더 많이 그것도 즐기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덩이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출혈로 하얗게 될 겁니다."
  
   그는 한국전에서 미국이 빠져나오기 위한 전략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한 구석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리고는 이 지역을 한국 정부에 넘겨주곤 나와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특히 유럽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재무장관의 의견을 물었다. 장관은 "미국의 재정 상태는 튼튼하므로 비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의 국방비는 네 배로 늘어 소련과 본격적인 군비경쟁이 시작된다. 40년 뒤 소련은 군비 부담으로 무너진다.
  
   고참 외교관 해리만은 트루먼 대통령이 발언을 권하자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지도력이 결정적이다"면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 나가 특별 연설을 할까 생각했다가 취소하였다. 그런 개별적 접근 방법은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해결엔 맞지 않다"고 했다. 그는 국가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헐뜯는 정파적 언론의 선동과 왜곡을 비판하였다. 해리만은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어야 미국이 단합할 것이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사이밍턴 상원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자 그는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면서 "노동자와 기업인들에게도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위급한지를 알리고 국력을 증강시키는 일에 협조하도록 호소하자"고 했다. 베델 스미스 CIA 부장은 "중공군이 우리를 수세로 몰아갈 수 있지만 쫒아내지는 못할 것이다"고 진단하였다.
  
   부통령은 에치슨에게 "우리가 체면을 구기지 않고 한국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에치슨은 "없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에서 오래 버티어야 할 것이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제습 대사는 "인도가 휴전안을 마련할 것 같은데, 현위치 휴전이 아니라면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로벳 국방차관은 전략문서 NSC-68에 따른 군비증강은 너무 늦다면서 최대한 빨리 戰力을 증강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바클리 부통령은 "이번 회기의 국회는 대통령이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날 회의는 결론이나 결정없이 끝났지만 한국전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냐를 놓고 벌인 최고위급의 토론회로서, '트루먼 재임기간중의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는 평을 듣는다(트루먼 傳記 작가 데이비드 매컬로프). 매컬로프는 '한국전에 참전하는 결정을 내린 회의에 버금 가는 회의였다"고 했다.
   <아무리 한국전이 참혹해지더라도 세계 전쟁으로 악화되도록 해선 안된다는 결론>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하여 저절로 도출되었다.
  
   미국의 지도부가 총망라된 회의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전쟁 지도 방향을 뒤집으려는 노력이 맥아더에 의하여 그 뒤 수개월간 진행된다. 중국 봉쇄, 만주 폭격, 장개석 군대의 투입 등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그의 압박은 먹히지 않았다. 맥아더에게 끌려가던 합참과 국방부도 돌아섰다.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 부정확한 정보 보고, 잇단 抗命이 워싱턴에서 그의 권위와 신용도를 떨어뜨렸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운명은 몇 차례 지옥의 문턱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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