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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부모 잃고 자수성가해 女교장에 오른 이야기
朴昌鎭(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2016년 04월06일  
'헬조선' '흙수저' 운운하는 이들에게 이 글을 읽히자! (2) / 오직 사명감 하나만으로 교단에서 헌신한 女교장 출신의 감동스토리



서울서 사흘 걸어 원주로 피난

假校舍(가교사) 교실 담벼락엔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말없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은 떠들고 뛰고 노는데 이들은 친구들의 노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 놀지는 않는다. 戰後(전후) 전방지구에는 偏母(편모) 가정이 많았고, 고아들도 수없이 많았다. 국군으로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의용군(공산당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전쟁에 투입된 민간인과 학생들)에 붙들려가서 죽고, 납치되고, 폭격·총격·수류탄에 죽고 부모를 다 잃어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한 반에 예닐곱 명은 보통이었다.

그 아이들은 어느 반에 가서나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구호품을 입은 옷 때문이 아니라 하나같이 얼굴색이 누르스름하고 표정이 없었다. 보통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는 반찬도 없는 꽁보리밥을 먹거나 죽을 먹는 집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본 고아원의 식사는 원조를 받아 운영되기에 일반 가정보다 훨씬 나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옷도 보통 아이들은 해진 옷을 입었어도 구호물품을 받아 입히는 고아원 아이들은 때로는 예쁜 원피스도 입고 있었다.

왜 그들은 놀지 않는가? 무엇이 그들의 웃음을 거둬 갔는가?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주고 보살펴주는 부모가 없다는 것이 단순히 배가 고프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이러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나를 편들어주지 않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 그것은 무엇으로도 대체되기 어려운 것이다. 어린이에게는 아무리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일지라도, 부모는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힘, 그 자체인 것이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母校(모교)로 첫 발령받아 담임했던 5학년 여자반의 모습이었다. 이 아이들을 보면서, 이 어린이들의 고통과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나는 교사가 된 것을 감사했다.

열한 살,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 갓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어머니는 適齡으로 들어간 나에게 두 번 월반시험을 치게 했고, 오빠는 5학년 때 중학 입시를 쳐서 갔다) 공부하던 서울에서 유학생 몇이 모여 걸어서 고향 집으로 내려올 때 한강 인도교가 끊어져 양수리 철교를 건너야 했다. 시퍼런 강물이 너무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려 빠질 것만 같았다. 벌써 인민군은 사방에 들이닥치고, 사흘이나 걸어서 원주에 도착했을 때는 폭격으로 온 시가지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 집도 불탔다.

원주는 그 뒤 1군사령부가 들어선 군사요충지였다. 어릴 적 몇 번 가 본 적이 있는 십여 리 떨어진 시골 농막에 다다랐을 땐,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피난이 늦어 공산군에게 납치되고, 어머니는 그날 아침, 아버지 면회를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6남매를 남기고 떠난 부모

마흔둘, 마흔의 부모는 그렇게 떠나갔다. 6남매를 남겨두고, 제일 큰 언니가 열일곱 살, 내 아래로는 여덟 살, 다섯 살, 두 살의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이튿날, 열네 살의 오빠는 불타는 연기 속에서 종일 여기저기 시체 덮인 가마니를 들추어가며 어머니를 찾아냈다. 경찰서 앞에서, 죽음이 무언지도 모를 어린 나이에 우리는 그렇게 戰場(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언니와 오빠는 낮에는 숨어 있어야 했다. 젊은이는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열한 살인 내가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나는 동생들이 불쌍해서 잘 울었다. 밥도 해야 되고 빨래도 해야 하고 갑자기 바뀐 환경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힘이 겨워서인지 자주 아팠다. 두 살짜리 젖먹이는 이따금 허공을 향해 “엄마” 하고 찾았다. 보채지도 않고 정말 순하고 귀여운 아기였다. 무엇에 체했는지 약은 없고, 제대로 돌보지 못해, 건강했던 아기는 점점 힘을 잃고 한 달쯤 지나 엄마를 따라 하늘나라에 갔다. 공습 때문에 불도 켜지 못하고, 물을 찾는 아기에게 끓인 물이 떨어져 찬 우물물을 떠 넣어주던 기억은 평생토록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것이 열한 살의 눈으로 본 6·25전쟁의 참상이었다. 전쟁은 인간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삶을 가져다준다. 마흔 살의 짧은 삶을 살다 가신 어머니, 억류되어 모진 세월을 살아가셨을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 생각에 痛恨(통한)의 일생이 되셨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사랑하는 부모님과 힘든 어린 날을 보낸 형제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가득하길 이 아침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첩첩산중 평창 진부로 발령받다

1956년 춘천사범을 졸업하고, 모교인 원주국민학교로 발령받았다. 전쟁으로 학교도 불타 일부 남은 교실과 판자로 지은 假校舍에서 수업했다. 교과서도 원조를 받았다는 것이 책 뒷장에 찍혀있던 시절이었다. 가난하고 모든 것이 어려운 속에서도 교사와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아이들의 학력을 올리기 위해 그 무거운 철판을 들고 와서는 밤새 시험 문제를 출제해서 原紙(원지)를 끊었다. 이튿날 5학년 여섯 개 반이 문제를 謄寫(등사)해서 시험을 보고 가르쳤다. 고학년들은 퇴근 후에도 교실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중학교로 올라가는 ‘연합고사’ 시험이 시작되었다. 교사도 학생도 추운 겨울에 내복도 입지 못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수업이 끝나면 합창지도를 했다. 교육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안정되어 가고, 교육 현장에 새교육 바람이 불면서 연구협의회와 발표 등 활발한 학교생활이 이뤄졌다. 교직에 대한 보람도 커갔다.

5·16 이후 도시와 농촌 교사 간의 교류가 이뤄졌다. 나는 평창 진부로 발령받았다. 당시 진부국민학교는 막 道(도)지정 시청각 연구학교로 지정되었을 때라, 도시에서 오는 교사라고 연구학교로 가게 되었다. 1960년대의 평창, 진부는 정말 첩첩산중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천지가 산뿐이었다.

연구발표를 하기 위해 환경이며, 교수학습지도의 연구며 그 해 내내 방학도 없이 늦게까지 일했다. 나는 전교에서 한 학급이 공개하는 특정 연구수업을 맡았다. 학교 방송도 전교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수업을 어떻게 하면 보다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밤중에 빈 교실에서 혼자 수업을 해 보기도 했다.

1960년대에 일반 학교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영사기며 오버헤드며, 첨단의 시청각 자료들을 활용하는 연구발표였다. 교감 선생님과 器機(기기)를 잘 다루는 연구주임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수업을 공개하는 날 道內(도내)에서 연구발표를 참관하기 위해 오신 손님들로 교실 안 교단 앞까지 꽉 찼다. 들어오지 못한 선생님들은 창문을 열고 복도에서 참관했었다. 시청각 기기를 활용한 수업과 방송활동은 참관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두가 노력을 기울인 만큼 성공적이었다. 강원도의 초등교육과장님이 참관하시고 좋은 평을 해 주셨다.

선생님들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잘 가르치는 것’

연구학교에서 수업공개와 학교 방송활동으로 춘천교대부속국민학교로 발탁되었다. 그때 나는 강원도연구소에서 나오는 월간 연구지에 교단 에세이 ‘그늘과 양지’를 연재하고 있었다. 평창국민학교에서 1년 근무할 동안 여름방학 때 관내 교사들의 연수가 있었다. 3일간 선생님들의 음악 강습이 나 혼자에게 맡겨졌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나는 이 기간 가장 효과적인 연수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악기가 없어도 악보를 보고 누구나 노래할 수 있는 ‘始唱(시창)’의 훈련을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훈련했다. 마지막 날엔 차이콥스키의 ‘비창’의 주멜로디도 부를 수 있었다. 경험적으로 어린이들은 시창의 훈련을 하면 악보를 읽을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사범학교 때 음악을 가르쳤던 정대범 선생님께 감사했다. 내 同期(동기) 중에는 도내 여러 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하는 친구가 여럿 있었다. 교육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서울 문리대 초대 학장을 지내신 권영대 박사님의 수필 속에서 “선생님은 왜 그렇게 어렵고, 재미없는 물리를 전공하게 되었는가”를 질문했을 때 학과장님은 “그렇게 재미없고, 어려운 물리를 그렇게 재미있고, 알기 쉽게 가르쳐준 중학교 때 일본인 물리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쓰신 것을 읽었다. 선생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잘 가르치는 것’이다. 좋은 수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硏鑽(연찬)과 헌신,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진부에서 1학년을 담임했을 때 학년 초 학교에서 가정방문을 실시하기로 했다. 나는 집이 가장 먼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진부읍내(실은 면소재지임)를 제외하고 멀리 사는 어린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씩 묻다가 ‘김운기’라는 그중 먼 것 같아 수업이 끝나고 아이와 같이 가기도 했다.

우리는 가난 속에서도 모두 공부를 했다

3월인데도 쌀쌀하고 추웠다. 어린이날에도 눈이 온 적이 있다고 했다. 해발 600m가 넘는 고산지대였다. 운기와 손을 잡고 가는데 산모퉁이를 돌기도 하고, 산을 넘기도 하면서 끝없이 갔다. 운기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산골이라 해가 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문도 달리지 않은 부엌에서 穀氣(곡기)라고는 잘 보이지 않는 시퍼런 나물죽을 쑤고 있었다. 운기 어머니는 해산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얼굴이 부어 푸석했다. 운기는 동생이 셋이다. 산골이라 어느새 어두워져서 산짐승이라도 나올 것같이 무서웠다. 돌아오는 길엔 산을 두 개 넘을 때까지 운기 아버지가 바래다주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운기와 그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났다.

운기가 집에 가면 그 어두운 외딴집에 호롱불도 없이 등잔불을 켜고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해서 잠들겠지, 그러고 나서 새벽 멀건 죽을 먹고 학교로 오겠지. 그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숙제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다. 학교에 오면 언 손을 녹여주거나 한 자라도 수업 중에 더 보살펴주는 것뿐. 교사도 학생도 가난한 것이 슬펐다.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전후(戰後)에 부모를 잃고 어린 동생들과 등잔불을 켜고 공부할 때, 숨을 크게 쉬거나, 책장을 펄럭이고 넘기면 등잔불이 꺼지기 때문에 살살 넘기라고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평생, 젊었던 부모님께 감사한 것은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머릿속에 있는 것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 (남매)는 가난 속에서도 모두 공부를 했다.

친구 따라 사범학교로 진학하다

1939년생인 나는 1950년 만 열한 살 때 시골에서 서울 시험을 봐서 진명여중에 입학했다. 한 달 남짓 다녔을까. 전쟁으로 다시 시골로 내려가 원주여중에 피난민 학생으로 다녔다. 1953년 열네 살 때 어떤 고등학교가 일찍 시험을 본다기에 (당시 춘천사범학교가 피난와서 원주에 본교가 있었음) 그 학교가 선생님이 되는 학교인 줄도 모르고 친구를 따라가 시험을 보았다. 시험 볼 때마다 나이가 모자라 문제가 되었으나 입학 성적이 괜찮아 합격되었다.

사범학교 입시에서는 수석으로 입학해 특대생 장학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교복도 사고 교과서며 학용품을 살 수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돈이 없어도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범학교 때 1학년과 3학년 두 번을 담임하셨던 정병시 선생님과 격려를 해주셨던 그 시절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나는 동생들 학비를 도와야 했다. 시내에서 5년 근무하다 진부에 와서는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고 적은 월급은 공대에 다니는 동생의 기숙사비로 보냈다. 동생은 누나가 기숙사비를 보낸 날은 더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다. 모두가 열심히 삶을 산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나는 좀더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니 노력할 것이다. 각기 다른 환경의 아이들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선생님이 되기를 소망한다.



1월에 아이 낳고 2월 개학 때 출근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은 대학 과정에서 실제 학교에 나가 수업을 참관하고 수업을 하며 교사로서의 경험을 익히는 과정이 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사범대학은 중등교사로 나가지만 학생의 성장 발달 과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도 실습을 하게 된다. 나는 교사 생활 22년 동안 실습 학교 근무를 14년간 했다. 교대, 사대 부속학교 교사는 초등이지만 전공과목의 교과 연구 실적이 있어야 한다. 실습생들에게 시범 수업을 항상 공개하기 때문이다. 춘천교대부속 시절엔 학급당 30여 명의 실습생이 1~2개월 계속하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된다. 지도교사의 시범수업은 물론이고, 실습생들의 수업지도와 수업협의 평가 실습錄(록) 등을 보려면 전등을 켜고 하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와 출제 등은 항상 집에 싸들고 와야 했다.

실습학교 지도교사의 사명은 실습을 통해 미래의 교사들에게 교사로서의 사랑과 헌신의 자세를 심어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실로 책임이 막중하다. 현장실습을 통해 아동에 대한 이해와 철저한 수업준비, 시간 관리이며 협의회를 통해 실습생들이 앞으로 교사로서의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교사는 롤모델(본보기)이 되어야 한다.

과거 사범학교만 나오고 교사가 된 사람은 적어도 교대생과 학력이 같아야 하기에 방학마다 교대에 부설된 교육대학 과정을 이수하여 정식 졸업을 했다. 1950·60년대엔 여교사는 결혼을 하면 대개 사표를 냈다. 춘천교대부속에는 결혼을 한 여교사는 없었다. 더욱이 출산한 여교사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곳에서 결혼을 했고 어린 애도 둘을 낳았다. 첫 아이는 1월에 낳고 2월 1일 개학과 더불어 출근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춘천은 겨울이 몹시 춥다. 産後(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몸이 붓고 아팠지만, 방학에 출산하여 학교와 담임하는 반 어린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생실습 두 달이 끝나는 마지막 날, 수업 협의회를 마치고 나니 오후 3시경이었다. 1967년 7월 15일을 토요일로 기억하는 것은 학교에서 집이 가까웠지만 몇 번씩 쉬어가며 겨우 걸어 왔기 때문이다. 저녁내 진통하고 이튿날 일요일 새벽(7월 16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닷새 후 7월 21일 방학식하는 날 학교에 나가 통지표를 나누어 주고 1학년이라 물놀이 등 안전 지도를 하고 방학이라 한 달을 쉴 수 있어서 고마웠다. 그 시대는 나뿐 아니라 다 그랬다. 내 친구는 횡성 시골에서 근무할 때, 친구와 함께 퇴근하는데 진통이 와서 모르는 집에 들어가 사정을 얘기할 사이도 없이 어린애를 낳았다. 그때는 産前(산전) 휴가는 생각지도 못하고 우리는 낳기 전날까지 근무했다. 다리가 퉁퉁 부어도 앉아서 수업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위해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동문학가이시며 중앙도서관장, 문교부 편수관을 하셨던 춘천교육대학의 최태호 학장님은 실습기간 중 부속국민학교에 자주 나오셔서 지도교사의 시범수업이며 실습생들의 수업을 참관하시고는 수업이 잘 이루어지면 만족해하시고 격려해주신다. 학장님은 방학이면 제자들이 근무하는 산간벽지이고 어디고 찾아가셔서 격려해주시는 참 스승님이시다. 학장님은 남편과 떨어져 있는 나를 안타까이 생각하시어 서울로 보내주셨다.

1969년 12월에 갑자기 발령이 났기 때문에 김칫독을 파서 이사를 했다. 서울 매동학교로 발령이 났다. 매동학교는 서울교대의 代用(대용)부속이었다. 서울교대부속국민학교만으로는 많은 교대생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서너 개의 공립학교를 선정하여 실습생을 받기로 했다. 교사도 선별해서 배정을 했다. 그러나 일반 공립학교의 교사는 실습학교 지도교사로서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처음에는 힘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매동은 대용부속 지정을 그해에 받았다.

발령장을 들고 교장 선생님께 갔더니 “교대부속에서 오는 선생님을 받기 위해서 9월부터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기다렸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1969년 겨울이었다. 이듬해 4월, 5월 4주간에 걸쳐 실습생이 나왔다. 나는 당연히 시범수업을 내가 해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강당에서 200여 명의 교생을 모아놓고 4월, 5월 두 차례 수업을 했다. 6월에 셋째 아이를 출산했으니 만삭의 몸이었다.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수업 협의회에서는 단위 시간의 목표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업者(자)는 끊임없는 연구를 해야 함을 강의했다. 한 번은 단위 시간의 목표를 16절지 한 장 가득 쓴 것을 잘 된 수업 案(안)이라고 해서 놀랐다. 학습 목표는 그 시간에 꼭 이뤄질 수 있는 것을 한두 개 세워, 지도 방법을 연구해야 함을 실습생들에게 주지시켜 주었다.
  
1학년 담임의 임무

다음 해는 1학년을 담임했다. 1학년은 길게 공부해야 하는 학교의 시작이다. 1학년 담임은 어린이들이 학교를 재미있는 곳, 아침이면 빨리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은 곳, 그리고 공부시간, 선생님과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적인 1학년 담임이다.

1학년은 우선 한글을 다 알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경험이 많은 1학년 담임일지라도 ‘받아쓰기’만 잘하면 다 가르쳤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교육 방법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불러주고 받아쓰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 ‘어떻게 하면 현장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라는 의미에서 연구교사를 선정한다기에 나는 연구계획서를 내기로 했다. 2회째다.

나는 ‘1학년 아동의 語彙(어휘) 확충을 위한 학습지도의 연구’로 계획서가 통과되어 한 학기에 한 번씩 두 번 실제 수업의 검증을 위해 검증단이 나와 평가하고 11월에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물론 그 바쁜 중에도 교생지도 수업은 계속했다. 1학년 아이들은 제법 긴 글을 쓸 수 있고, 독서량도 많아졌다. 그 공로로 국어과의 ‘금상’을 받고, 시교육위원회의 추천으로 서울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로 발령받았다.  

예쁜 핸드백 대신 큰 남자 가방을 들고 다니다

나를 발탁해 준 이혜우 교장 선생님은 내 교직 생활에 가장 존경하던 분이다. 교사로서, 교감, 교장 관리직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그분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늘 생각했다. 이혜우 교장님 아래서 사대 부속국민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담임교사는 실습생이 있을 때는 항상 연구수업을 한다. 나는 실습을 철저히 시키는 편이다. 서울사대 교육과를 나온 남편은 ‘실습’ 기간은 평생 교직 생활하는 동안 가장 열심히 하는 시기임을 강조한다.

담임교사는 실습으로 인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하는 동안 실습생들에게 얻는 것도 있다. 한 교생이 한 아동을 ‘사례연구’를 하게 하여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때 미처 몰랐던 그 아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때문이다. 서울사대생들은 中等(중등)에 나가지만 初等(초등)에서도 열심히 실습에 참여하는 모습이 좋았다. 부속학교는 교생실습뿐 아니라 새교육과정을 개정하고 교과서를 바꿀 때 先手(선수) 학습을 통해 전국적으로 교과별로 공개하고 토론한다.

나는 교육부 ‘국어과 교육 과정 심의위원’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학습량은 적당한가, 소재의 선택은 적절한가, 학년의 수준에 적합한가 등을 심의한다. 부속학교는 공립학교에 비해 업무량이 많은 편인데 모두 열심히 일한다. 교생실습이 끝날 즈음엔 입술이 부르틀 때가 여러 번 있을 만큼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 지나고 보니 교사일 때, 예쁜 핸드백을 들어본 적이 없고, 큰 남자 가방에 칠판 등을 넣고 들고 다녔다. 교직이야말로 사명이 없으면 감내하기 어려운 ‘職(직)’이다.

심청전으로 능력을 인정받다

서울사대부국은 격년으로 한 해는 체육대회, 또 한 해는 학예예술제를 개최한다. 附國(부국)생활 2년 차 1973년 예술제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국어과 담당이기 때문이다. 2년 전, 학교는 ‘백설공주’ 오페렛타를 성공적으로 공연했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34세의 내 경험으로는 버거운 짐이었다. 나는 퇴근 후 국립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어린이에게 적합해야 하고, 교육적인 시사점이 있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유명한 극작가이신 신봉승 선생님도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은 방송결재를 받으러 들어가면,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맞아 주셨다. ‘해낼 수 있을까’라는 점을 내가 느낄 수 있었다.

부속국민학교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선생님은 무엇을 잘하는가, 아니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셨다. 나는 ‘학교 방송’과 ‘문예지도’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은 교장실 옆에 ‘방송실’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누가 누가 잘하나’ 해설이 있는 음악 이야기 등 활기차고 재미있게 해 나갔다. 나는 교직 생활 중 무엇을 제안이나 지시받았을 때 단 한 번도 ‘못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가 활기있게 움직이는 모습을 만족스러워 하신 것 같다. 나는 고민하던 중 어린이의 심성에 ‘孝(효)’의 마음을 심어줄 수 있는 ‘심청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결재를 받고 직원회에 발표를 했다. 사극이라 무대장치며 힘든 점이 있지만, 나의 의사를 존중해 ‘심청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여러 책을 읽고 어린이에게 맞는 오페렛타 대본을 써내러 갔다. 대사와 노랫말로 작곡은 서울교육대학의 유덕희 교수님께 부탁했다. 음악 담당 선생님에게 합창 지도를, 무용은 무용 담당 선생님께, 연극은 내 班(반) 아동의 삼촌이 연극하는 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 어려운 무대 장치는 우리나라 국정교과서 4~6학년 사회과의 삽화를 그리고 있는 강태현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배역에 맞는 아이들을 각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선발하고 연습에 들어갔다. 모든 선생님이 열심히들 협력했다.

발표가 가까웠을 때는 거의 밤 10시까지 일했다. 나는 밤에 盲啞(맹아) 학교도 들려 자문을 구했다. 심청전을 선택한 데 대해 너무도 고마워했다. 나 자신도 처음으로 장애를 가진 이에 대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공연 날이 다가왔다. 모두들 합심해서 노력한 덕분에 대성황이었다. 강당엔 학부모와 어린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조명이며 연출을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을인데도 속옷이 다 젖어 있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기 전 노래를 애절하게 부를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청이가 황후가 되고, 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합창도 멋있고 배꾼도 잘하고 무대도 화려했다. 학부모님들은 그간 어느 때보다 감동적인 연극이었다며 학교의 예술제로는 아깝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수고했다”는 말씀을 하실 때 눈물이 났다. 모든 선생님들이 내 일처럼 할 마음이 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신 데 대해 마음 깊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서른아홉에 군자국민학교 교감

1978년 9월 나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군자국민학교의 교감으로 승진 발령받았다. 교장님은 ‘과수원 길’을 작곡하신 김공선 선생님으로 나의 사범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젊은 나이어서 교장님도 얼마간은 걱정하셨을 것이다. 주임 선생님 열두 분 중 제일 젊은 한 분이 나와 동갑이고 모두 연배였다. 나는 출근하면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주임 선생님 말고도 연세 높은 분들이 많아 서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편했다. 학생 수가 삼천 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나는 업무를 하나하나 익혀가며 학교운영계획서를 작성하던 중 연수계획이 있었다. 학년에서 시범 수업자를 선정하는데 문제에 부딪혔다. 어떤 학년에서는 제비를 뽑고, 또 어떤 학년에서는 교대를 갓 졸업한 선생님을 선정했다. 재수 없이 걸리는 것이 연구수업이고, 경력이 적어 주임이 시키는 대로, 싫지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시범수업이었다. 나는 이렇게 선정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선생님들의 ‘수업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시범수업이 재수 없어 걸리는 수업이어서는 안 된다. 경험이 없는 갓 졸업한 선생님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일본에서는 60대의 교사가 시범수업에 참여한다. 노련한 수업 기술을 젊은 교사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1학년을 담임한 선생님이 내게 “교감 선생님은 부속국민학교에서 근무하셨으니까, 그곳 아이들은 똑똑하고 발표도 잘하지만, 이곳은 안된다”고 했다. 답답했다. 교감의 말에 할 수 없이 시범 수업자를 경력이 좀 있는 선생님으로 바꾸어 보기로 하고, 모두가 못한다고 해서 난감해 하는 주임도 있었다. 나는 고민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

솔선수범

교장 선생님, 연구 교무주임과 함께 의논했지만, 관례가 그랬기 때문에 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교감인 나부터 솔선수범한다면 재수 없어 걸리는 것이 연구 수업이라는 인식은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시범 수업을 하기로 했다. 교생 실습 학교에서, 연구 학교에서는 수업을 공개했지만, 그때는 ‘내 班(반)’이었다. 그러나 수업은 수업자에게 달렸지, 아이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1학년 국어과 수업을 하기 위해 수업案(안)을 작성하고 자료를 만들고, 학급 선택은 ‘이곳의 아이들은 안 된다’고 한 그 반을 선정하고 담임선생님께 좌석표를 붙여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다른 선생님이 우리 반에 오신다고 말했다. 나는 전교 선생님들과 함께 그 교실에 들어갔다. 나는 이름을 불러가며 발표를 잘했을 때 칭찬을 해주면서 재미있게 수업했다.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공부했다. 되도록 여러 아이들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수업이 끝날 때 한 학생이 “선생님 언제 또 와요?” 하고 물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내게 많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학습지도안, 발문계획, 학습 자료를 1학년 선생님들에게 넘겨주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돌아가면서 자료와 학습지도안대로 수업을 했더니, 재미있게 잘되더라고 했다. 좋은 수업이란 철저한 준비다.

그간 연구수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수업 평을 하기 위한 평이라던가, 연습수업이란 생각들을 한 면도 있었다. 수업은 소박하고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들은 조금은 이해했을 것이다. 그 후 시범 수업자는 그 학년에서 수업을 제일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을 선정했다고 했다. 그 변화가 고마웠다.



학생이 많아 2부제로 수업

2년 후 나는 동명국교로 전출했다. 6학년만 열여섯 반인 만큼 큰 학교였다. 1, 2학년은 각 열두 반인데 교실이 모자라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 학교에서도 수업연구 선정은 前 학교와 다름없이 제비뽑기로 하고 있었다. 나는 동명에서도 한 학기에 한 번, 일 년에 두 번씩 시범수업을 공개했다. 그리고 학년의 수업자는, 과학은 과학 주임, 국어는 국어과 주임 등 중견 교사들로 지명을 했다. 선생님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열심히들 했다. 시교육위원회 장학 지도 때, 특정 수업을 연륜이 있는 중견 교사가 공개하는 데 대해서, 타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수업자로 지명되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큼 변화되었다.

선생님들은 승진하려면 연구 점수가 있어야 한다. 전국대회에 ‘푸른기장증’을 받거나 시도 연구대회에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받아야 한다. 때마침 서울시 교육회에서 초중고 직급에 관계없이 교원 실기대회를 개최하여 우수한 작품에 따라 연구점수를 주고 있었다. 회화, 서예, 문예 등 세 부문이었다. 나는 선생님들을 독려하여 그림을 잘 그리거나, 서예를 잘하는 선생님은 물론, 문예는 누구나 가르치니까 나가자고 했다. 선생님들을 독려하기 위해 나도 詩(시) 분야에 참여했다. 선생님들도 세 분이 입상하고, 나는 1981년과 1982년 2회에 걸쳐 詩 부문 최우수 금상을 받았다.

사범학교만 졸업한 선생님들에게는 방송통신대학도 권유해 여러 명이 지원해서 공부했다. 교사의 연수는 수업 발전에 꼭 필요한 것이다. 1983년 교장 강습 수강 후 동부교육청 학무과장께서 관내 10개 학교의 선생님들께 국어과 연수를 부탁했다. 나는 가장 효과적인 연수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의견을 듣기로 했다. 우리 선생님들은 ‘수업’을 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나는 학습지도안과 자료 등을 준비해 두 분 선생님과 함께 학교를 방문해 수업을 했다. 저학년, 고학년 고르게 했다.

公職은 어느 분야든 책무를 철저히 해야

우리 학교에서와 같이 담임선생님은 좌석표만 준비했다. 全교직원과 함께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고 협의회를 통해 수업에 관해 질문도 받고 강의도 했다. 선생님들의 진지한 모습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자료와 학습지도안을 주고 활용해 보라고 했다.

교감의 일은 찾아서 하면 끝이 없다. 동명국민학교는 해방 전해인 1944년에 설립되었다. 학교에 수영장도 있었다. 그 당시 성동구 마장동은 어려운 지역이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사람은 軍(군)이 면제되어 학적기록을 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학적계 선생님이 졸업생 생활기록부를 찾으러 가면 함흥차사다.

나는 이상히 여겨 학적장부가 있는 서고에 가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에 학생 수가 많다 보니 학적부가 떨어지고 뒤엉키고 마구 나뒹굴러져, 찾아오는 것이 신기했다. 철끈이 다 삭아 끊어지고 떨어졌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상황을 교장 선생님도 서무실도 알지 못했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서무실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다. 나는 출근하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오전에는 1, 2학년 오후반 선생님 열두 분과, 오후에는 오전반 선생님 열두 분의 협력을 얻어 정리하고 표지까지 말끔히 처리하는데 근 2주가 걸렸다.

그 옛날에도 어느 한 해 철끈 대신 철사로 묶어 서류가 달아나지 않도록 한 교무 주임이 있었다. 학적계를 담당한 임 선생님이 “그동안 학적계 한 것이 억울해서, 내년에 다시 학적계를 달라”고 해서 웃었다. 공직은 어느 분야든 책무를 철저히 해야 함을 다시 한 번 깊이 느꼈다.

마흔여섯에 송파국민학교 교장 발령

1985년 8월 1일 신설 ‘송파국민학교’로 승진 발령받았다. 신설학교란 校舍(교사)만 덩그러니 지어져 있지 어린이 책걸상 외엔 아무런 시설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없는 빈 운동장뿐이다. 당시 송파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있는 센터이다. 그 중심에 있는 학교를 개교하는 것이다. 신설 학교는 체육기구라든가, 사무용 책걸상 등 기본적인 것만 지원되지, 모든 것은 학교장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

새로 승진해 온 김을영 교감 선생님과 역시 처음 서무 책임자로 승진해 온 30세의 젊은 조상래 서무과장, 우리는 셋이서 8월 한 달 찌는 여름날 학교의 모습을 갖추느라 밤낮없이 일했다. 송파는 중대국교에서 아이들을 받는데, 대개는 전임 학교에서 분반해 보내주는데, 우리는 그냥 받아왔다. 5학년 이하 전교생을 교감 선생님 혼자 밤새워 분반했다.

조상래 서무과장은 한 푼이라도 교비를 절약하기 위해 서무실에 앉아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고, 을지로며 중부시장을 직접 나가서 구입했다. 교사용 책상과 의자를 사러 간 날은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걱정이 되어 현관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트럭에 한가득 싣고 들어왔다. 그는 정직하고 일도 신속히 처리하고 성품이 좋아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보기 드문 유능한 젊은이다. 선생님들도 열심히 일했다. 학부모님들도 적극 협력했다. ‘송파(松坡)’여서 소나무를 심어야겠는데 너무 비싸 걱정하고 있을 때 올림픽공원에 조경을 한 부모님이 계셔 교실 2층보다 높은 소나무를 실비만 조금 받고 일곱 그루 심어주셔서 감사했다.

겨레의 희망이 여기 자란다

서울사대부국에서 함께 근무한 미술에 뛰어난 강태현 선생님은 校標(교표)를 도안해 주고 전교의 환경을 도와주셨다. 학교는 점점 틀에 잡혀가고 모든 선생님들의 협력으로 아름다워졌다. 현관에는 5학년 4개 반 전 아동의 활짝 웃는 대형 사진 위에 “겨레의 희망이 여기 자란다”를 걸었다. 모두가 멋있다고 했다.

내실 다지기 시작으로 전교생의 독서 지도를 했다. 내가 교사일 때 경험한 것으로 4학년을 담임했을 때 가장 많이 읽는 아동은 한 해에 단행본 80권을 읽어냈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는 저항이 있다.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학교장은 이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용은 TV는 1시간 이내 보기, 하루 한 가지 착한 일 하기, 책 읽기(읽은 책과 페이지 수를 기록하기). 때로 내용은 조금씩 바뀔 때도 있지만, 독서만은 1년 내내 계속한다. 학부모 확인을 받고 선생님도 확인한다. 선생님은 재미있었는가 물어가면서 60명을 확인하는데 7분이면 족하다. 한 달에 한 번 반별로 카드를 걸어 교장도 확인한다.

예를 들어 국어 단원에 ‘월광곡’이 나왔다면 교과서에는 에피소드나 에센스(essence)만 나와 있지만 ‘베토벤 傳記(전기)’를 읽은 아동은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수업은 활기차고 저절로 된다. 역사, 과학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방학 과제는 중학년 이상 위인전기 하나, 과학, 역사, 창작동화 하나, 네 가지 종류의 독후감 과제를 주고 시상한다.

어린이들은 놀랍게 성장하고 발전한다. 5학년을 받아와서 6학년을 졸업한 1회 졸업생이 ‘가락중학교’에 갔는데(신설 학교라 타학교에 비해 졸업생 수는 적었다), 시험을 봐서 반장을 선출하는데 12학급 중 송파교 졸업생이 10학급에서 반장이 나왔다고 해서 나도 놀랐다.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했다.

“처음으로 대접받으면서 연수한 느낌이에요”

신설학교는 부족한 것이 많다. 그중 과학 실험 기구는 수업 중 학급 全아동이 할 수 있게 갖춰주어야 한다. 선생님들은 방학에 한두 가지의 연수를 하게 된다. 나는 강남교육청에 과학 실험 연수를 우리 학교에서 하겠다고 신청했다. 대개 학교에서는 연수 장소로 결정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교장, 교감은 물론 자리를 지켜야 하고 많은 손님도 오가기 때문이다. 나는 실험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신청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이 연수에 사용한 모든 새 기구를 그 학교에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연수 장소로 결정되었다.

교감 선생님, 서무과장, 주임 선생님들과 몇 차례 회의를 하고 신설학교라 깨끗한 것은 좋지만 부족한 것이 많다 보니 우리들의 노력으로 최대한 보완해 보자고 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을 좀 더 편리하게 수강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계획해 나갔다. 그 숱한 연수를 받으면서 내가 불편했던 것을 한 가지씩 해결해 간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누구도 같은 느낌일 수 있다.

그 첫째가 화장실이다. 시범 연구학교 발표에 참관해서도 화장실이 냄새나고 청결치 못하면 그 인상은 흐려지고 만다. 적어도 하루 종일 연수하자면 화장실 사용은 모든 사람이 한 번 이상 너댓 번은 이용하게 된다. 이때 청결한 화장실과 화장지, 비누, 수건이 마련되어 있으면 화장실 출입이 기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폭염에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것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다음엔 없어서는 안 될 전화의 설치 등이 고려되어야 했다. 우리는 즉시 잠실 전화국에 두 대의 공중전화를 요청했다. 아시안게임 관계로 공중전화 수요가 늘어 힘들다는 것을 연수일정 동안만 대여해줄 것을 사정했더니, 장거리도 할 수 있는 전화를 설치해주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위해 예쁜 사기 컵과 유리컵 백 개를 샀다. 플라스틱 컵은 어쩐지 손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바구니에 ‘사용한 컵’과 ‘새 컵’을 구분해 놓아 계속 깨끗이 씻어다 놓았다. 물은 보리를 넣고 전기 온수 보일러로 끓여 큰 주전자 스무 개에 담아 우유 냉장고에 식혀서 주전자 가장자리에 뽀얗게 이슬이 맺히는 것을 교대로 내놓았다. 시원한 보리차가 있어도 취향에 따라 커피나 사이다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 연수 동안만 커피 자동판매기를 놓고 사이다, 콜라 등 음료를 연금매점 가격 그대로 판매했다. 학교는 냉장고 전기료와 운반비, 그 외 모든 수고는 우리가 봉사했다. 학교 아저씨 두 분은 아침 6시면 교실 창문을 모두 열어 후덥지근한 실내 공기를 식히는 일부터 시작해서 청소를 말끔히 해 놓는다. 수강 선생님들이 모두 끝나서 퇴근하면 화장실은 매일 물청소를 해서 깨끗했다.

연수기간 동안에 교육장님을 비롯해 손님도 많이 오셨다. 여드레간의 연수 일정이 끝나는 날엔 수강 선생님들의 평가와 함께 설문지도 받았다. 설문 내용 중에 ‘연수 중 불편했던 점’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점심’이라고 한 선생님이 서너 분 있을 뿐, 그 외에는 모두가 ‘없음’이라고 했고, 자유롭게 기술하는 난에 많은 선생님들이 학교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썼다.

이번 연수 장소를 제공하고 느낀 것은 ‘봉사’에 대한 마음이다. 몇 사람이 수고해서 수백 명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던 점이다. 교감 시절 함께 근무했던 적이 있는 김계순 선생님이 마지막 날 내 방에 들러서 “이렇게 깨끗한 학교에서, 처음으로 대접받으면서 연수한 느낌이어요.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예쁜 목걸이를 선물로 주고 갔다. 선생님들의 ‘감사했다’는 그 말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다. 나는 진심으로 열심히 봉사한 우리 직원들에게 감사했다.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교문에 두 개의 크고 둥근 ‘송파’ 교표를 銅版(동판)으로 달고, 국기게양대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그리고 그 옆에는 나라꽃 무궁화의 꽃말을 나지막한 탑에 역시 동판으로 새겨 콘크리트에 붙였다. 학교 사랑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길러주고 싶어서다. 전교 어린이들에게는 교가와 교표를 인쇄해서 주고 책받침에도 교포와 교가를 넣어 開校(개교) 선물로 주었다. 간직하고 들여다보면서 학교를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싹 틔워주고 싶어서였다.

애국심은 무엇인가. 애국은 나라 사랑에 대한 도덕적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나의 조국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며,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어버이에 대한 孝(효)가 지식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은혜와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인 것처럼 도덕 교육은 지식의 교육에 그쳐서는 안 된다. 도덕적 사태에 직면해서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심성 교육이 되어야 한다. 애국심을 기르는 교육은 감정·태도 및 가치 교육, 즉 정의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 사랑의 마음은 민족의 역사와 전통, 문화풍토 속에서 길러진다고 볼 때 어린 시절 가정에서 부모의 가르침과 특히 어린 초등학교에서 길러진다고 볼 수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어떻게 어린이의 마음속에 참다운 나라 사랑의 마음을 길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 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학교가, 교사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교육해야 할 것인가.

인간은 가장 존엄한 것이고, 교육은 바로 올바른 인간을 기르는 일이라고 볼 때, 우리는 참다운 인간교육의 실천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내일을 밝게 하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해야 한다. 6·25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도 아직도 전쟁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핵으로 위협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는 참혹한 북한을 보면서 어린이들에게 반공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한다. 애국심은 내가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을 그리워하는 鄕土愛(향토애)며 조국애이고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고 헌신하려는 뜨거운 마음이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국민정신교육’의 과제를 주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생각해보는 가운데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어서다.

평생을 교단에서 함께 보낸 부부

남편 또한 교직에 奉職(봉직)하고 있었다. 평생을 고등학교 현장에서 가르쳤고, 市(시)교육위원회, 교육부 장학부서에서 보람 있는 날들을 보냈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중에 퇴근하던 날들이 많았다. 어느 땐가 혼잣말로 “바지 벗고 맘 놓고 잠 한번 잤으면…” 하던 독백이 기억에 남는다. 그 시대의 교육자들은 누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자기 직무에 열정을 다해 살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고맙게 생각한다.

이제 살아온 인생 길목을 여기저기 되짚어 보면서, 남편과 함께 교직에 봉직하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해본다. 그러나 아쉬움도 많다. “더 많이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더 많이 땀 흘리면서 살았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교육만이 나라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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