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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병도 버리고 도망친 군대, 현리 大敗의 교훈
趙甲濟
2015년 11월29일  
"부상병들이 뒤엉켜 트럭에 짐짝처럼 실린 채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던 장면이 아직도 꿈에 나옵니다."

    
  어제 부산의 부산일보 10층 강당에서 월례 강연이 있었다. 끝나고 고정 참석자 세 분과 코피 숍에서 담소를 하였다. 경찰관 출신인 88세의 成榮勳 씨는 6.25 전쟁 때 3군단 3사단의 통신병으로서 그 유명한 강원도 인제군의 縣里 大敗를 경험하였다.
  "모든 장비를 불태우거나 파괴한 뒤 후퇴를 하는데, 지휘계통이 무너졌습니다. 장교와 사병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산을 넘어 후퇴하는데 분대, 소대 단위의 지휘도 되지 않았습니다. 군인이 아니라 군중으롤 변하였습니다. 저는 부하 열명 정도를 데리고 북극성을 보면서 남쪽으로만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자곤 하였습니다. 서로 몸을 끈으로 묶어서 낙오자가 없도록 한 덕분에 1주일 뒤 民家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이 경북 봉화군 춘양이란 마을이었습니다(약200km의 山中 남하). 현리를 포기할 때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던 부상병을 버리고 왔습니다. 그들을 트럭에 태워 후송하려던 차에 중공군에 포위당하였고 후퇴명령이 떨어지니 아무도 부상병들을 도와주지 않아요. 다리를 다친 부상병들은 "나를 내려다오. 걸어서 가겠다"고 했지만 그들을 도와 주는 동료도 없었습니다. 부상병들이 뒤엉켜 트럭에 짐짝처럼 실린 채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던 장면이 아직도 꿈에 나옵니다."
  
  현리 대패는 지휘관이 판단을 잘못하면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그렇게 되면 이성적 행동이 불가능하여 조직이 潰滅(궤멸)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1951년 5월 16일 저녁 중공군은 동부 전선에서 대공세를 펴면서 麟蹄(인제), 현리, 오대산, 설악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3군단(3, 9사단)과 미 10군단 예하 국군 5, 7사단을 집중적으로 때렸다. 이 4개 사단이 아무래도 미군보다 취약했기 때문이다. 16일 밤 10시쯤 9사단의 李龍文 副사단장이 劉載興 3군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왼쪽에 인접한) 7사단이 밀리고 있어 오마치 고개가 차단될 것 같습니다. 사단의 중장비를 미리 빼겠습니다.”
  
  劉 군단장은 “야포는 빼지 말고 계속 사격지원을 하라”고 명령했다. 낙동강 방어전 때 ‘영천 會戰(회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유재흥 장군은 이때 오마치 고개에 병력을 투입하여 확보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현리 大敗는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때 전방 산악지대에 배치된 3군단의 2개 사단, 즉 3, 9사단에 대한 유일한 보급로가 이 오마치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이 고개를 敵이 차단하면 2만 병력이 전방에서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재흥 군단장은 9사단 29연대의 1개 예비대대를 이 고개에 배치했다. 그런데 미군 측은 앞서 전투 지경선을 조정하면서 이 고개를 3군단이 아닌 10군단의 7사단 관할로 변경시켜 버렸다.
  
  劉 군단장이 항의해도 알몬드 10군단장은 막무가내였다. 알몬드 군단장은 한술 더 떠 오마치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재흥은 “무슨 소린가. 우리 군단의 생명선을 우리가 지키는데”하고 버텼다. 알몬드는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면서 상급인 8군사령부에 항의, 9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렇게 무인지경이 된 이 요충지를 중공군이 기습 장악해 버린 것이다. 중국 측 공간사에 따르면 ‘抗美援助支援軍(항미원조지원군) 20군 60사단은 신속하게 적의 중심을 향해서 진격하여 5월 17일 새벽 3시에 오마치 일대를 점령, 국군 3, 9사단의 철수로를 차단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지도상으로는 23km이지만 실제 거리는 30km를 넘는 험준한 산중을 8시간 만에 신속한 야간행군으로 돌파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것이다. 이 경이적 행군속도가 유재흥 군단장의 계산을 흔들어 버렸다.
  
  劉 장군은 지형과 거리를 감안하여 敵이 오마치에 도착할 시간을 17일 오후로 보고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밀어닥치는 중공군을 받아내기도 힘든데 유일한 철수로까지 차단되어 사실상 포위되어 버린 3, 9사단은 혼란상태에 들어갔다.
  
  劉 군단장은 17일 오후 경비행기를 타고 현리에 내려 3사단장 김종오, 9사단장 최석을 불렀다. 군단장은 “9사단장은 병력을 수습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 철수로를 확보하고 3사단장은 현리 전방을 지켜 9사단의 후방공격을 엄호하라”고 명령한 뒤 군단사령부가 있는 하진부리로 돌아왔다. 나중에 그는 “내가 현리에 남아 오마치 탈환작전을 직접 지휘했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이날 오후 5시 劉 군단장은 兩 사단장이 요청한 보급품을 현리에 공중투하했다. 이날 밤 늦게 육본에서 군단장에게 “3군단을 창촌─오대산선으로 후퇴시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 9사단 사령부에 연락을 취하니 통신이 되질 않았다. 군단 사령부의 全 참모들을 전방으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18일 아침, “아군은 오마치 공격을 해보지도 않고 분산, 지금 방대산 쪽으로 빠져나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유재흥은 啞然失色(아연실색)했다.
  
  群衆으로 변한 군대
  
  3, 9사단은 왜 붕괴했는가. 5월 17일 새벽에 양 사단의 유일한 퇴로가 지나는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우회 점령되자 2개 사단 약 2만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이 전방 방어선을 포기, 현리─용포리 부근으로 집결했다. 밀려든 병력과 차량으로 폭 5m도 안 되는 좁은 길이 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이날 오후 최석 9사단장은 30연대로 하여금 오마치 고개를 점령, 活路를 뚫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30연대(연대장 손희선 대령)는 그 일주일 전에 중공군으로부터 매봉산, 한석산을 탈환한 전투력이 강한 부대였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는 ‘17일 밤 적이 사격하는 포탄이 용포리─현리 간의 도로에 낙하하기 시작하자 혼란이 일어나 어떤 영문인지 30연대의 1대대, 2대대는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지 않고 방대산으로 철수했다. 다리골과 구만동선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3대대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도 상부의 지시가 없어 연대본부에 사람을 보냈더니 철수하고 없었다’고 적고 있다.
  
  3대대 예하 10중대원들은 철수통보를 받지 못한 채 개인호를 파고서 모두 잠들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30연대장 출신 손희선(육본 인사참모부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 역임)은 이 기록을 반박한다.
  
  “저는 오마치 돌파 명령을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마치 고개 북쪽 고지에 배치되어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받았을 뿐입니다.”
  
  최석 사단장이 과연 30연대장에게 오마치 고개 돌파 명령을 확실하게 내렸는지는 애매하다. 그는 생전 증언에서 유재흥 군단장으로부터 돌파 명령을 받았는지도 확실치 않다고 했을 정도이다. 9사단 30연대를 엄호하여 오마치를 돌파하기로 되어 있었던 3사단 18연대(연대장 유양수)는 30연대의 공격을 기다렸으나 공격개시 시각(밤 9시)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수색중대를 30연대 쪽으로 보냈다. 30연대를 포함한 9사단이 방대산 쪽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최석 사단장을 수행하고 있었던 김재춘 군수참모는 “주변에서 소총소리가 들리니까 사단장은 지휘를 포기하고 방대산으로 올라갔다. 그때 최석 준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독전해야 할 사단장이 무질서한 후퇴를 선도한 셈이다. 9사단 28연대 부연대장이던 염정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후퇴로가 막혀버려 아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리─용포리에 모여 있던 장병들 사이에는 공포감이 확산되었습니다. 밤이 오고 오마치 돌파에 실패하자 순식간에 집단적인 공황 상태가 빚어졌어요. 아직은 중공군이 현리 쪽으로 집중사격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장병들은 뿔뿔이 방대산으로 기어올라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휘체계가 무너져버린 것은 敵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영천회전의 영웅’ 유재흥 당시 3군단장은 17일 오후 현리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작전명령을 내린 뒤 군단 사령부로 돌아갔었는데, 포위망 속의 장병들은 이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야, 군단장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군중심리도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2개 사단은 싸워보지도 않고 방대산(해발 1,436m)을 타고 후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지휘체계는 마비되었으며 조직이 와해되어 버렸다. 군대가 群衆(군중)으로 변해버렸다.
  
  군인(특히 장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명예의식이 내면화되어 있지 않고 강제적 규율에 의해서만 봉합되어 있는 군대는 위기를 맞으면 눈 녹듯 해체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 물론 결정적인 책임은 도망에 앞장선 지휘관들의 무능이었다. 최석 사단장의 부임 이후 벌어진 박정희 참모장과 사단장 사이의 갈등, 참모들과 사단장 사이의 불화 등은 이런 위기 때 지휘부의 단합을 저해했을 것이다.
  
  군대가 붕괴해버리면 사단장이나 이등병이나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의 체력만 믿고 제 살길을 찾아간다. 명령계통도 통신도 마비된다. 장교들은 붙잡힐 때를 대비해 계급장을 떼버린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사병에게 허기진 장교가 좀 달라고 해도 거절당한다. 군악병은 나팔이 무겁다고 버리고 갔다. 심지어 시계도 무겁게 느껴져 풀어던져 버렸다. 산길에 무겁다고 重火器도 버렸다. 높이 1,000m가 넘는 산과 계곡,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사흘간 달아나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매복, 요격, 추적을 받은 兩 사단 약 2만 명 중 6,000명 이상이 전사, 아사, 부상, 실종되었다. 9사단 병참참모 김재춘 중령은 “몸이 크게 쇠약해져 있던 박정희 참모장이 부대에 남아 있었더라면 후퇴과정에서 탈진하여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때 박정희 참모장 숙소에서는 젖먹이가 딸린 아주머니가 가정부처럼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저와 함께 후퇴하는데 깊은 계곡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때 敵의 총격이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건너는데 그 아주머니가 제 앞에서 가고 있었습니다. 등에는 빈 포대기만 있어요. ‘아주머니, 아이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떠내려간 아기를 찾는다고 야단합디다만 이미 늦었지요.”
  
  ‘돌아온 死者(사자)’ 趙昌浩(조창호) 소위는 당시 9사단 30연대 1대대에 배속된 포병 관측장교였다. 한석산에 있다가 철수명령을 받고 有線(유선) 가설병과 함께 전화선을 거두면서 포대 본부로 돌아오니 모두 철수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 뒤 3일간 산중을 헤매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남행길에 국군과 미군들을 더러 만났으나 뭉쳐서 걸으면 들키기 쉽다고 해서 개인행동을 했다. 그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민가에 들어갔다가 그 집에 와 있던 중공군에게 붙잡혔다.
  
  5월 18일, 미군은 국군이 현리에 버리고 간 수백 대의 차량과 대포들을 폭격하여 불태워버렸다. 9사단이 철수 48시간 뒤 직선거리 약 50km 후방 속사리에서 재집결했을 때 병력은 약 1,300명에 불과했다. 9사단의 최종적인 피해는 총병력의 약 35%, 총화기의 약 80%였다. 중공군은 5일간의 공격으로 인제에서 하진부리까지 약 100km를 돌파했으나 보급선이 길어지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5월 23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 失地(실지)를 회복했다. 화가 난 밴플리트 美 8군사령관은 국군 3군단을 해체하여 9사단을 美 3사단에, 3사단을 국군 1군단에 배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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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榮勳 씨는, "그때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포자기를 하니 무서운 게 없어지더군요. 적군의 포격중에도 냇물 속으로 들어가 목욕을 할 정도였습니다."
  
  成 씨는 진격 중에 붙잡은 포로는 살려주지만 후퇴 중에 잡은 포로는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전쟁의 생리라고 덧붙였다.


國軍은 입이 없나? 國軍을 主敵으로 몰고 반역자를 감싸는 利敵 교과서에 국방부가 침묵해도 되나?
향군(鄕軍)노조, 민노총이나 한노총에 가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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