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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敵행위를 하다가 죽임을 당한 두 국가원수 이야기
趙甲濟
2014년 02월08일  
베니스의 파리엘, 러시아의 피터 3세, 프랑스의 페탕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는 '두칼레 팔라초'라는 口자 모양의 장대한 베니스 공화국 정부청사 건물이 있다. 要塞(요새)같은 건물 속에 내부 정원이 있다. 거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위. 여기서 서기 1355년 국가 원수 마리노 파리엘은 금빛 나는 원수모자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참수당하였다. 최고 권력기관인 10인 위원회의 한 위원이 창 끝으로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아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 원수 이외에 11명의 음모자들은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파리엘이 평민들과 짜고 민중봉기를 선동, 共和政(공화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다. 비록 미수사건이라 해도 베니스 지배층은 國體(국체) 변경 음모를 가차 없이 응징한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 영토, 헌법 등 國基(국기)를 뒤엎으려는 반역에 대해선 大逆罪(대역죄. high treason)라고 하여 보통 死刑(사형)으로 처벌한다.
  
   敵將(적장)을 편들다가 쿠데타를 부르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경우가 러시아의 피터 3세이다. 그는 피터(러시아語로는 표뜨르) 大帝(대제)의 딸인 앤의 아들이었다. 피터 3세의 아버지는, 스웨덴의 찰스 12세(그는 북방전쟁에서 피터 대제와 자웅을 겨루었던 영웅이었다)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찰스 프레데릭이었다. 덴마크 령 홀스타인 공작이었다.
   어머니 앤의 언니 엘리자베스는 쿠데타로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가, 1761년 12월25일에 죽었다. 그가 후계자로 지명해두었던 여동생 앤의 아들이 황제가 되어 피터 3세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는 연합하여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를 상대로 7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러시아 군이 베를린을 3일간 점령하는 등 勝機(승기)를 잡았고 프러시아 軍은 항복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피터 3세는 어릴 때부터 독일적 환경 속에서 자라 프레데릭 2세 숭배자였다. 그는 황제가 되자 동맹국을 배신하고, 일방적으로 프러시아와 휴전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프레데릭은 몰락 직전에 구제되었다. 피터 3세는 러시아 정교의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개신교를 지원할 태세를 갖추어 러시아의 오랜 전통을 무시하였다.
  
   러시아 장교들은 그들이 겨우 코너로 몰아넣은 프러시아를 살려준 '이상한 황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피터 3세는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이었는데, 親프러시아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러시아 군의 복장, 훈련, 전술을 敵軍(적군)인 프러시아 모델로 바꾸도록 명령, 장교들을 모욕주었다. 敵將을 사모하는 軍통수권자로 비친 피터 3세는 홀스타인 문제를 트집잡아 덴마크에 宣戰(선전) 포고, 전선에 나갔다가 쿠데타를 당한다. 주도자는 황비 케서린(러시아 語로 에카트리나)과 젊은 장교단이었다. 폐위된 피터 3세는 그 직후 쿠데타 주도 장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남편을 죽음으로 몰면서 즉위한 케서린 2세는 大帝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를 잘 하여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開明(개명)군주로서 페테스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다.
  
   프랑스의 반역자이자 영웅 필립 페탕 장군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轉役(전역)을 기다리던 58세의 고참대령이었다. 전쟁이 나자 그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을 거쳐 제2군 사령관으로서 유명한 베르당 전투를 지휘했다. 獨佛(독불) 쌍방이 낮은 野山지역에서 맞붙은 이 陣地戰(진지전)에서 양쪽이 약 80만 명의 死傷者(사상자)를 냈다.
   나는 3년 전 베르당의 전투기념관을 구경한 적이 있다. 프랑스측에서 15만 명 분의 쌍방 유골을 수습하여 거대한 기념관 건물 안에 꽉 채워놓고는 유리창을 통해서 들여다보게 해놓았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유골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일 것이다.
  
   베르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물러서지 않아 이긴 셈이 되었다. 페탕은 '베르당의 영웅'으로 불리게 된다. 1917년에 그는 프랑스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戰後(전후)엔 국방장관,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군의 전격전에 밀려 6주만에 붕괴되자 그는 국가원수로 추대되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페탕의 名聲(명성)도 작용하였는지 패전국 프랑스는 상당히 너그러운 대접을 받았다. 히틀러는 페탕을 존경했다고 하는데 그는 프랑스 국토의 5분의 2를 페탕이 영도하는 비시 정부의 관할로 넘겨주었다. 이 비시 정부 구역엔 나치 독일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비시 정부는 독립국처럼 행동했다. 독일이 벌이는 전쟁에도 휘말려 들지 않으려고 중립을 선언했으나 뒤로는 독일을 지원했다. 페탕은 프랑스의 敗因(패인)이 자유민주주의를 악용한 무질서와 부패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가톨릭의 전통에 입각한 건전한 풍습을 진작시킨다면서 여러 가지 개혁정책도 폈다. 물론 독재적 수법을 썼고 反유태인 정책을 폈으나 비시 정부 지역의 거주자들은 독일의 간섭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다가 美英(미영) 연합군이 北아프리카에 상륙하자 독일은 1942년 11월11일에 비시 정부 구역 내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페탕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연합군이 1944년 6월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프랑스 수복에 나서자 나치는 페탕을 독일로 데리고 가서 연금했다.
  
   1945년 4월 독일의 항복선언 직전에 페탕은 프랑스로 돌아왔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한때 페탕 장군의 부하였던 드골 수상은 총살형을 종신징역형으로 감형했다. 페탕은 1951년 옥중에서 죽었는데 89세였다. 최근 프랑스에선 페탕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의 명성과 자존심이 패전국 프랑스의 전면적 붕괴를 막았고 인명 희생을 많이 줄였다는 이유에서이다.
  
   페탕은 한국의 형법 93조 與敵罪(여적죄,'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抗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에 비교하면 동정의 여지가 있는 반역을 범한 경우이다. 그는 敵國과 합세하긴 했으나 조국에 對敵(대적)하진 않았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敵國과 협력했다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1차 세계대전의 救國(구국)의 영웅은 83세에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식 正義라면 敵國(북한정권=準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抗敵(항적)한 자는 100세가 되어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軍 통수권을 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는 영토의 포기, 국가 시스템(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불법 변경이나 훼손, 동맹국 배신, 利敵(이적)행위, 간첩(지원)행위, 애국자 탄압, 敵軍의 이념체계나 가치관 추종, 반역집단 양성, 敵의 무기 개발 지원 등이다. 일개 병사의 利敵행위도 총살형인데, 수십 만의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利敵-반역행위는 국가적으로 반드시 단죄되어야 한다. 그래서 與敵罪는 사형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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