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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에서 찾은 李承晩 대통령의 親아들 묘소
국민행동본부 (2016.02.19) ㅣ 프린트하기

부모를 그리워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鳳秀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친아들 봉수의 묘비/조갑제닷컴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넘어온 18일(미국시간), 우리 일행은 이 지역에서 在美韓人들을 대상으로 李承晩 대통령 바로 알리기 운동을 펼쳐온 황준석 목사(필라델피아 ‘큰믿음제일교회’ 담임목사)의 안내로 1906년 미국에서 사망한 李承晩 대통령의 親아들 묘소를 찾았다.

李承晩은 생전에 親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도 이 부분은 누락되어 있다. 親아들 鳳秀(아명: 泰山)의 묘지는 황 목사의 자택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걸리는 거리로 ‘82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공동묘지(‘Lawnview’ 공동묘지)에 위치해 있었다.




황준석 목사의 인도로 추모기도를 하고 있는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 일행의 모습/조갑제닷컴  


鳳秀의 작은 묘비에는 ‘TAISANAH’라는 영문 이름과 함께 양 옆에 생년인 1899와 사망년도(1906년)가 새겨져 있었다. 영문 ‘태사나’는 李承晩이 ‘태산아’라고 부르던 것을 들은 미국인이 발음을 그대로 영어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鳳秀가 죽기 1년 전 李承晩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편입해 학업과 강연을 병행했다. 朝鮮에 홀로 남아 있던 그의 첫 번째 부인 朴씨(본명: 朴承善)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7대 독자였던 鳳秀를 미국으로 보냈다.

이승만은 영어를 못하는 어린아들을 키울 수 없어 신문에 “이 아이를 맡아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WANTED A home in a Christian family for little Taisanah Rhee)”며 광고(<워싱턴타임스>, 1905년 6월4일자)까지 냈다.




이승만 대통령 친아들 묘역의 전경/조갑제닷컴  


이후 鳳秀는 기독교인 보이드 부인(Mrs. Boyd)에게 맡겨졌고, 그녀는 다시 鳳秀를 보육원(Western Home for Children)에 맡겼다. 그리고 여덟 달 만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사망했다. 李承晩은 아들이 죽는 그 시간에도 교회(Riverdale Presbyterian Church)강연을 했다. 이후 전보를 받고 달려갔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다.

記者에게는 23개월 된 딸이 있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여행은 즐겁지만 아기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말도 안통하고, 치료제도 없었던 디프테리아에 걸려 부모를 그리워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鳳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1904년 11월 미국에 밀사로 건너가기 전 찍은 이승만의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부인 박씨, 이승만, 모자를 쓴 사진 중앙의 어린아이가 봉수이다/자료사진


[관련자료]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1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 泰山이 디프테리아에 걸려 急死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李承晩(유영익,「이승만의 삶과 꿈」(1998)에서).>





포츠머드 러-일강화조약과 특히 대리공사 金潤晶의 배신 행위에 크나큰 좌절감을 느끼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李承晩이 「乙巳保護條約」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자서전 초고나 공식전기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는 국내 사람들과는 달리 제국주의 일본의 「保護國」이 될 수밖에 없는 조국의 운명을 분명히 예견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의 상황과 관련하여 그는 자서전 초고에서 〈오로지 남은 하나의 희망은 한국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고 그 길은 기독교 교육이라고 나는 믿었다. 나의 (인생)목적은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1)고 적고 있는데, 이 말은 「을사조약」 파기운동을 위해 상경했던 金龜(九)가 民衆의 애국심을 함양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전도활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長連으로 돌아간 일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흥미있다.



李敬善에게 生計 걱정하는 편지 보내



이 무렵의 李承晩의 생각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가 하나 보존되어 있다. 閔泳煥이 자결한 지 한 달 뒤인 1905년 12월30일부로 부친 李敬善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아버님전 上書



11월10일의 마지막 下書와 桂洞집 회계 문건은 잘 받아보았사옵고 위안이 되옵나이다. 論文폭에 대략 말씀드렸으므로 새로 여쭐 것은 없사옵니다.



저는 매일 분주하와 東西로 뛰어다니오며, 聖誕日에는 泰山이 가 있는 곳에 있는 한 부인이 二元銀을 보내어 몇몇 한국인들과 조반을 같이 하라 하야 서너 사람이 회식하였사옵고, 泰山은 그날 여러 집에서 먹을 것과 장난감 등을 많이 보내어 와서 뛰어놀며 날을 보낸다 하오니 다행이옵나이다. 공부는 여일하옵고, 다만 典洞대감(원문은 「典台」. 閔泳煥의 집이 典洞에 있었음)이 세상을 떠났사와, 柴糧(시량: 땔감과 양식)을 무엇으로 지탱하시는지 삼가 송구스럽사옵나이다. 兪主事는 일이 이렇게 밖에 되지 못한다고 하오니 다시 다음을 기다려야 하오려니와 민망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사옵나이다.



국기 여나므 폭을 만들어 보내라고 며느리에게 부탁한 것이 도무지 오지 않으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음양력 달력 한 장 보내어 주시옵소서. 이만 줄이옵나이다.



1905년 12월30일



아들 承晩 上書〉2)



閔泳煥의 자결 소식을 듣고 李承晩이 가장 심각하게 걱정한 것이 가족들의 생계문제였음을 이 편지는 말해 주고 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편지는 원본이 아니라 李承晩 자신에 의한 사본인데, 편지 위쪽에 “Min Young Whan is dead. Who will support our home?”이라고 영어로 적어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閔泳煥이 죽었으니 누가 우리 집을 보살펴 주겠느냐는 한탄을 굳이 영어로 적어 놓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동안 閔泳煥은 李承晩을 미국에 보내면서 약속한 대로 李敬善의 생계를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었음을 이 편지는 말해 준다. 「을사조약」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신의 견해가 늙은 李敬善의 공연한 걱정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 편지는 아들 泰山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고 있어서 흥미롭다. 李敬善은 자기도 모르게 며느리가 美國으로 보낸 손자의 일을 여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李承晩이 오래 囹圄生活을 하는 동안 자신이 손수 기른 7대 독자였다. 이 무렵 李承晩은 泰山을 필라델피아의 보이드(Boyd) 부인에게 맡겨 놓고 있었다. 泰山이 크리스마스에 보이드 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푸짐한 선물을 받고 기뻐 뛰놀면서 날을 보내고 있다고 李承晩은 부친에게 보고하고 있다.





아내에게 太極旗 만들어 부치라고 부탁



그리고 이 편지는 李承晩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가까운 한국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보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李承晩의 형편을 잘 아는 보이드 부인이 은화 2달러를 보내 주었고, 그 돈으로 서너 사람이 회식을 했다고 李承晩은 적고 있다.



李承晩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중요한 집안일은 자신이 챙기고 있었던 것도 이 편지는 시사해 준다. 그것은 주로 식구들의 生計와 관련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兪主事」는 일찍이 옥고를 같이 치르면서 의기투합했던 兪星濬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확인할 수 없다. 內務衙門 主事, 度支衙門 主事를 역임한 바 있는 유성준은 공교롭게도 李承晩의 편지와 같은 날짜인 1905년 12월30일에 通津郡守로 발령받고 있다.3) 「兪主事」에 대한 언급으로 미루어 李承晩은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 인사들과 시국문제나 개인적인 일로 편지내왕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흥미 있는 것은 아내에게 태극기를 여나므 장 만들어 보내라고 했는가 하면, 새해를 맞아 음양력 달력을 부치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李承晩은 李敬善뿐만 아니라 朴씨부인과도 따로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朴씨부인이 왜 얼른 태극기를 만들어 보내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다. 태극기는 아마 미국인들에게 선물을 하거나 또는 강연을 할 때에 쓸 필요가 있었는지 모른다. 음양력 달력을 부치라고 한 것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도 아직도 거의 음력을 쓰고 있는 한국의 여러 가지 상황을 짐작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講演으로 生活費 벌어



李承晩은 미국에 도착해서부터 시작한 강연에 더욱 열성을 쏟았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부터 연사로 나서는 일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그의 연설은 萬民共同會의 급진 과격파로서 청중을 선동하던 때와는 성격이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의 군색한 생활비를 버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림으로써 한국의 친구가 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강연할 때의 모습에 대한 올리버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그가 미국사회에서 선동정치가로 성장해 가고 있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는 연단에 올랐을 때의 흥분을 즐겼으며, 청중들의 진지한 주의와 갈채에 고무되었다. 李承晩의 목소리는 퍼그나 낭랑하고 부드러웠고, 고저와 강약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동양적 무표정의 근엄한 자세와는 반대로 그는 풍부한 표정과 몸짓으로 특출한 의사표시를 했다. 미국과는 환경이 매우 다른 한국에서 대중연설가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미국에서도 이내 대중연설에 숙달해졌다. (그러나)연사로서의 그는 연설의 기교보다는 생생한 경험과 열정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다.〉4)



이러한 표현은 물론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이 미국에 도착하여 1910년에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계속해서 연설을 하고 다녔고 그 사례비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부적인 재질뿐만 아니라 그의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기도 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은 1905년 가을에도 여기저기에서 강연을 했다. 그의 일기(Log Book)에 보면, 10월에 한 번, 11월에 네 번, 그리고 12월에는 아홉 번이나 강연을 하고 다녔다.



李承晩의 12월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12월1일. 뉴욕 장로교회에서 강연.



○12월3일. 갈보리 침례교회의 중국인 성경반에서 강연.



○12월5일. 오전11시 30분. G가 10번지 모퉁이에 있는 제일 조합교회(First Congregation Church).



○12월6일. 오전 11시. 메릴랜드州 발티모어의 매디슨가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 파크 애비뉴 818의 와일리(M.Wylie)부인에게서 개인적으로 9달러 받음.



○오후 8시. 주임목사 도널드 거드리(Donald Guthrie) 목사에게서 개인적으로 15달러 받음.



○12월10일. 오후 7시. 파운드리 M.E.교회의 엡워스 연맹.



○12월13일. 토마스 서클에서 20분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에서 강연. 7달러 40센트를 捐助(연조) 받음.



○12월15일 오전 1시30분. 트리니티 M.E.교회.



○12월17일. 오후 7시30분. 일요일. 브라이트우드 공원 M.E.교회, 파워즈(E.C. Powers) 주임목사. 9달러 97센트를 연조 받음.



○12월24일. 일요일 저녁. 브루클런드 침례교회에서 강연.



이처럼 李承晩은 강연을 한 날짜와 시간과 함께 누구에게서 돈을 얼마 받았다는 것까지 아주 꼼꼼히 적어 놓았다. 아마 돌아와서는 감사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의 강연에는 환등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풍물과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 그리고 점점 향상되어가고 있는 한국인들의 생활상 등 미국인들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을 담은 슬라이드를 준비해 가지고 다녔다. 李承晩의 이러한 행동은 黃海道 시골사람들을 상대로 문명국의 문물을 환등기로 소개하면서 계몽강연을 하고 다닌 이 무렵의 金龜의 행적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슬라이드는 기독교 선교본부 같은 데에서 입수했을 것이다.



李承晩이 강연을 할 때마다 특히 강조한 것은 韓國의 독립 유지야말로 日本의 팽창 야망을 저지할 수 있고 美國의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다. 청중들은 그의 연설의 첫 부분에서는 큰 흥미와 공감을 표시했으나 뒷부분에서는 거북해 하는 반응을 보이기가 일쑤였다.5)



李承晩은 여러 교회의 YMCA나 성경반 모임 등에서 뿐만 아니라 조지 워싱턴대학교 안의 YMCA주최 강연회에서도 연사로 뽑혀 그의 사진이 다른 연사들의 사진과 함께 홍보 전단에 실리기도 했다.





泰山이 회충약 먹느라고 단식하다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李承晩의 바쁜 강연 일정은 이듬해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그의 1906년 1월치 일기에는 여덟 번 강연을 하고 다닌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이 해에 그는 무려 서른 여섯 번이나 강연을 하고 다녔다.



이처럼 바쁘게 강연을 하고 다니는 동안에 李承晩은 어처구니없게도 아들 泰山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요일인 2월25일 저녁에도 리버데일의 장로교회에서 강연을 했는데, 泰山은 같은 날 저녁 7시에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泰山은 朴容萬을 따라 미국에 온 지 여덟달 만에 죽고만 것이다.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라고 한마디만 적었으나,6) 26일자 일기에는 태산이 죽은 경위를 자세히 메모해 놓았다.



2월24일 오후 11시30분에 그는 필라델피아의 네이션(The Nation)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泰山은 회충약을 먹느라고 이틀째 단식을 하고 있는데, 『심하게 아프다』는 것이었다. 전보를 받자마자 그는 바로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필라델피아행 기차는 두 시간 반쯤 뒤에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우체국으로 가서 「내가 지금 곧 가야 하는지. 속히 답하기 바람」이라고 네이션 앞으로 전보를 쳤다. 즉각 답전이 왔다.



「조금 진정되고 있음. 편지를 보냈음. 다시 쓰겠음. 네이션」



전보를 받고 조금은 안도감을 느낀 李承晩은 편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25일 오후 2시쯤에 李承晩은 또 다른 전보를 받았다. 그것은 보이드 부인이 보낸 것이었다.



「泰山이 위독함. 즉시 아취가 1520번지로 오시오」



李承晩은 보이드 부인에게 9시30분 차로 떠나겠다고 전보를 치고 그대로 했다. 26일 새벽 2시30분에 그는 보이드 부인 집에 도착했다. 보이드 부인은 말하기를 泰山은 사흘 동안 앓아 누웠었는데, 의사는 아이가 그 무서운 전염병인 디프테리아에 걸렸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사는 泰山을 시립병원으로 보냈고, 그곳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디프테리아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만일에 李承晩이 泰山을 보러 병원에 간다면 檢疫法에 따라 적어도 한 달은 병원에 억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억류되어도 좋다고 말했다. 李承晩이 단호하게 말하자 보이드 부인은 말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가보시구려』



李承晩은 정거장으로 나와서 밤을 새우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11시가 되자 편지 한 장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베어링가 41번지에 있는 「웨스턴 홈」의 머피(Murphy) 부인이 보낸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泰山이 25일 저녁 7시에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 泰山의 시체는 브르덴버크스가의 옷펠로우(Oddfellow) 공동묘지에 묻혔다.7)



보이드 부인은 泰山을 자기 집에 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웨스턴 홈」(Western Home for Childern)이라는 보육시설에 맡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머피 부인은 그 보육시설의 주인이었다. 泰山의 분묘 기록에도 분묘 주인이 「머피 부인」으로 되어 있다.8)



泰山의 묘는 뒤에 이장되어 현재 필라델피아 근교의 론뷰(Lawnview) 공동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RHEE 1899 TAISANAH 1906」이라고만 새겨 있을 뿐 다른 아무 기록이 없다. 이름이 「TAISANAH」으로 되어 있는 것은 李承晩이 『태산아』 하고 부르는 것을 보고 보이드 부인은 그것이 아이의 이름인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1945년에 귀국한 뒤에 만난 처조카 朴泰然이 泰山의 일을 묻자,『내가… 묘는 잘 써 줬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9)



다만 李承晩의 일기에 적힌 「네이션」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먼 이국 땅에서, 그것도 너무나 급작스럽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은 李承晩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 엄청난 충격 속에서도 李承晩은 일기에 아무런 감정표현 없이 냉철하게 태산이 죽은 경위를 시간까지 정확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李承晩은 생전에 朴씨부인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泰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공식 전기에도 이 부분은 누락되어 있다.





朴씨부인은 泰山이 죽은 뒤에도 사진 지니고 다녀



李承晩은 영어생활을 하는 동안 泰山을 불러 옥 안에서 같이 자기도 했었다. 할아버지 밑에서 어리광으로 자란 아이는 少年囚들과 곧잘 싸움을 하여 李承晩은 아들을 심하게 때려 주기도 했었다. 미국에 도착한 뒤에 잠시 金潤晶의 집에 있을 때에는 그런 대로 괜찮았으나, 워싱턴 시내의 어떤 미국인 집에 맡겨 놓았을 때에는 환경 변화와 언어장애를 견디지 못하여 주인부부의 옷을 물어뜯는 등 이상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10)



泰山을 미국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은 朴씨부인은 泰山이 죽은 뒤에도 아들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 사진은 徐載弼과 나란히 손을 잡고 찍은 것이었다고 하는데,11) 사실이라면 그것은 李承晩이 泰山을 보이드 부인에게 맡기러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에 서재필을 방문하고 찍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泰山의 죽음은 李敬善의 며느리에 대한 증오감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것은 일생을 두고 그의 가슴 한 구석에 공허감과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남았던 것 같다. 만년에 李康石을 양자로 맞으면서 지은 「有感」이라는 詩는 그러한 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十生九死苟生人/열에 아홉 번 죽을 고비를 살아온



六代李門獨子身/李씨가문의 6대 독자 몸



故國靑山徒有夢/고국청산은 꿈에도 못 잊건만



先塋白骨護無親/선영의 백골이야 돌볼 이 없어라.>12)



이 詩는 양자를 맞은 기쁨보다는 새삼스럽게 느끼는 공허감과 죄책감을 되새기는 詩이다.



어린 외아들을 공동묘지에 묻고 며칠 되지 않은 3월4일에 李承晩은 다시 강연을 시작했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저녁에 리버데일 아래쪽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28달러를 모금해 받았다. 엘리스(Ellis)라는 소년이 작은 봉투를 주었는데, 그 속에는 돈 15센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李承晩씨 사랑합니다. 가장 어린 소년 엘리스로부터.〉



이 사실을 일기에 적으면서 李承晩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죽은 아들의 모습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행동본부 와 자유북한운동연합은 천안함폭침 6주기를 맞아, 오는 3월28일(월)오전11시 서부전선(오두산 전망대 주차장)인근에서 대북공중어뢰(대북풍선)’ 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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