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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次世界大戰 발발 70주년의 날에
국민행동본부 (2009.09.01) ㅣ 프린트하기

한국군은 평화에 물든 프랑스군, 북한군은 투지만만한 독일군을 닮은 게 아닌가?
  

  오늘은 1939년 9월1일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로 쳐들어가 2차 세계 大戰을 일으킨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大戰의 결과로 日帝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되었으니 우리의 운명을 바꾼 날이다. 2차 대전의 씨앗은 1차 대전이 뿌렸다. 1차 대전의 勝戰國 프랑스가 敗戰國 독일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고 모욕하는 바람에 독일사람들이 화가 나서 독재자 히틀러를 등장시켜 2차 대전으로 달려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1차 세계대전 때 主戰場은 프랑스-독일 국경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지긋 지긋한 참호전으로 150만 명이 戰死하였다. 20대 인구의 약40%가 죽었다. 특히 베르당 요새 공방전에선 獨佛 兩軍 80만 명이 죽었다. 베르당의 살육전에 진저리를 친 프랑스 지도부는 人名희생을 최소화하려는 뜻에서 獨佛 국경지대에 마지노 요새를 만들어 안주했다. 이 방어적인 전쟁개념은 1930年代 프랑스의 국가적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를 간파한 히틀러는 戰爭不辭의 공갈작전으로 라인란트 進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성공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히틀러의 확장정책에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경고를 해둔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소련뿐이라고 생각하고 宿敵 스탈린과 손 잡는다. 1939년 8월 말 獨蘇불가침조약을 맺어 소련을 중립화시키는 것이다. 히틀러는 소련을 중립으로 돌려 놓으면 독일이 폴란드를 쳐도 영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誤算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전격전으로써 폴란드를 한 달 만에 요절낸다. 영국은 말로써는 독일에 경고했으나 실제로는 폴란드를 돕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못한다. 실제로 도울 수단이 없는데 왜 폴란드에 대한 보증을 섰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막을 수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막지 못하고 막을 수 없는 폴란드 침공은 막겠다고 보증을 함으로써 히틀러를 자극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연합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이겨 히틀러를 타도하긴 했으나 유럽의 半을 히틀러보다 더 악독한 스탈린에게 내주었다. 늑대를 쫓아 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었다.
  
  히틀러가 主力을 폴란드 침공에 돌렸을 때 獨佛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2 대 1로 프랑스가 우세했다. 프랑스 98개 사단 對 독일 43개 사단. 사단의 질에서도 프랑스가 우세했다.
  
  이때 프랑스가 先制공격을 하면서 독일로 밀고 들어갔다면 프랑스 군대는 독일의 루르 공업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히틀러는 항복하든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왜, 프랑스는 이 先制타격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다음해 독일로부터 先制공격을 당해 6주 만에 무너져버렸던가. 많은 연구가 이 점에 집중되었다. 수년 전에 나온 하버드 대학의 戰史學者 어네스트 R. 메이 교수의 책 「이상한 승리」(Strange Victory-Hitler’s Conquest of France)를 읽어보았다. 기자는 1996~97년 하버드 대학에서 니만 팰로우(언론재단 연수생)로 수학할 때 메이 교수의 강의를 1년간 들은 인연이 있다.
  
  메이 교수가 著書에 「이상한 승리」라고 이름 붙인 것은 프랑스 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쓴 「이상한 패배」에 대응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패배」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까치 출판사). 저자 블로크는 역사학자였는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이 책을 유언처럼 쓴 뒤 독일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이 책은 프랑스의 패배를 연구하는 데 필독서로 꼽히고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기도 하다. 블로크는 프랑스가 독일군을 너무 깔보고 자신들의 戰力을 과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메이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부는 히틀러가 감히 프랑스에 대한 正面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블로크는 프랑스 군대가 人命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너무 신경을 썼다고도 지적한다. 마지노線을 만들어둔 것은 요사이 이라크 전쟁처럼 과학과 기술로써 人命손실을 代替하겠다는 건전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인간 대신 기계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공세적 상상력이나 신속한 대응이 어렵게 된다.
  
  독일군은 프랑스군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이 劣勢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프랑스를 정면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을 때, 군부는 반대했다. 군부와 히틀러는 강대한 프랑스 군대를 꺾을 방도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갑부대로 아르덴느 숲 돌파, 프랑스 군대의 배후를 기습한다」는 절묘한 방책을 고안해 냈다.
  
  1939년 9월이나 10월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작전에 주력을 투입함으로써 서부전선에 허점을 보였을 때 프랑스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부는 연합군이 승리하고야 말 것이라고 過信했다. 경제봉쇄나 독일군의 도발에 대한 응징 형식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先制공격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둘째, 프랑스군 지휘부는 영국군과 함께 피를 흘려야지 프랑스군만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단독 진격을 망설였다. 즉, 어차피 이길 전쟁인데 우리가 먼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심리구조가 결정적 先制공격의 찬스를 놓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험적 독일군과 守勢的 프랑스군의 대결]
  
  프랑스軍 지휘부의 생리
  
  하버드 대학의 어네스트 메이 교수는 上記 저서 「이상한 승리」에서 1940년 독일이 6주 만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가장 큰 功을 독일군의 정보부서에 돌렸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 티펠스킬크 장군과 그 휘하의 리스 대령이 프랑스군 지휘부의 생리와 병력배치, 그리고 방어전략을 정확히 파악하여 독일군의 공격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메이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정보 수집능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독일군의 정보기능은 작전기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의 정보기능은 作戰 담당자에게 조간신문을 던져놓고 가는 식으로 상호간에 유리되어 있었다고 했다.
  
  티펠스킬크 소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語를 잘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수집에는 適格의 인물이었다. 리스 대령은 승마선수로도 유명한 엘리트 장교로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파악한 프랑스 참모본부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프랑스 지휘부는 안전성을 대담성보다 중시한다. 즉,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지휘관들의 재량권이 제한되어 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확실할 때만 공격한다. 전투현장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好機를 잡았을 때 이를 이용하여 戰果를 확대하려고 해도 상부로부터의 규제가 많아 어렵다는 결론도 도출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서는 1938년 가을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프랑스軍이 보인 반응을 면밀히 분석했다.
  
  프랑스軍은 공격보다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우는 데 注力했다. 프랑스군은 또 벨기에 국경지대에 主力을 배치했다.
  
  독일 정보부서는 프랑스 장교들의 행태는 기본적으로 방어위주이며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공격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군 참모본부가 분석한 프랑스군의 행태는 방어 위주의 프랑스 사회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지는 현상이기도 했다. 요컨대 프랑스군은 소극적이고 관료적이라 변화무쌍한 전쟁상황에 신속하고 대담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질이 못 된다는 이야기였다.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士氣가 고양된다. 國土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戰果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1939년 12월에서 1940년 초에 걸쳐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의 主攻은 벨기에 북쪽으로 향할 것이라 믿고 主力 75개 사단을 벨기에 쪽 국경지대로 집결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主力 가운데는 프랑스의 기계화 사단과 자동화 사단의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원래 「황색 작전」(Yellow Plan)이란 작전명으로 1940년 1월17일에 프랑스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作戰 개시 며칠 전 이 作戰문서의 일부를 갖고 가던 장교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벨기에 지역에 불시착하였다. 장교는 문서의 일부를 불태웠으나 나머지는 벨기에軍에 넘어갔다. 히틀러는 작전계획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을 연기했다.
  
  이 「황색 작전」의 핵심은 제1차 세계대전 前에 독일의 참모총장 슐리펜이 만들었던 작전 계획과 거의 같았다. 슐리펜 계획이라 불리는 이 작전의 핵심은, 서부전선의 右翼에 主力을 집중시켜 벨기에를 돌파하고 프랑스의 옆구리를 강타한 다음 거대한 좌회전을 하여 파리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이 作戰이 성공하려면 右翼에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슐리펜이 물러나고 大몰트케의 조카 小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小몰트케는 소심하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右翼에 너무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면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左翼으로 역공을 펼 때 방어가 어렵게 된다고 걱정하여 우익에 붙여 주어야 할 병력을 左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이 변형된 슐리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 작전계획엔 전제조건이 있었다. 중립국인 벨기에로 우익의 主力을 진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기에를 작전의 공간으로 삼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벨기에로 독일군이 쳐들어가자 그때까지 참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이 변형된 슐리펜 작전계획에 따라 진격을 계속한 독일군은 파리 근교 마른느까지 진출했으나 조프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끈질긴 방어전에 걸려 마지막 순간에 진격을 멈추고 후퇴하고만다. 戰史家들은 당초 계획대로 右翼에 압도적 병력을 배치해 두었더라면 마른느를 돌파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를 쉽게 무너뜨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아르덴느 기습 돌파전
  
  히틀러는 이 슐리펜 작전계획의 原案대로 프랑스를 치려고 했다. 비행기 사고로 공격이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의 主力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영국군의 主力과 정면충돌하여 지구전으로 갔든지 독일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戰史家들이 많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독일의 몇몇 장군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슐리펜 계획의 반복사용에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런 반론을 무시했다가 공격이 연기된 상황에서 작전계획을 再考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참모총장 할더 장군에게 새로운 作戰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
  
  이때 할더 장군은 이미 정보참모부장 티펠스킬크 소장과 리스 대령으로부터 主攻을, 벨기에 북부 평원이 아닌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을 통해 프랑스 세단으로 나오는 방향에 놓는 게 유리하다는 연구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르덴느 숲 지대로는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戰線에는 아주 취약한 방어부대만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1939년 12월에 독일군 참모본부는 워 게임을 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가므랑 장군役을 맡은 것은 독일 정보참모부의 서부과장 리스 대령이었다. 이 게임에서도 기갑군단을 아르덴느 숲지대로 보내 프랑스의 취약한 방어선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리스 대령은 이런 평가를 했다고 한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가면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슐리펜 계획을 연상하여 이것이 主攻이라고 속단하고 자신들의 主力軍을 벨기에로 北進시킬 것이다. 이때를 기다려 독일의 主力인 A집단군의 선봉 기갑군단(10개 기갑사단)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버 해협 쪽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영국군 主力의 배후에 독일 기갑군단이 나타나 연합군을 남쪽의 파리와 북쪽 벨기에로 兩斷한다. 그런데 파리 쪽에는 예비병력이 소수이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
  
  배후가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랑스군 지휘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리스 대령은 오랜 프랑스 지휘부의 행태 연구를 통해서 신속한 대응, 즉 돌파된 프랑스 戰線으로 북쪽의 主力軍을 재빨리 이동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斷定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생리가 임기응변에 약하고 자세한 명령을 받기 전에는 作戰 변경을 하지 않는 데다가 통신망이 취약하고, 전화는 도청된다고 人便을 통해서 명령을 수령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0년 5월10일 히틀러는 변경된 「황색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쳐들어가자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기다렸다는듯이 主力軍을 벨기에로 北上시켰다. 독일군은 B집단군이 主攻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사이 10개 기갑사단을 핵심으로 한 진짜 主力인 A집단군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 지대를 지나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현지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아르덴느 숲지대를 戰車가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쉽게 통과했다. 이 길가의 나무를 베어 길에 걸쳐 놓기만 했어도 독일 기갑부대의 통과를 늦출 수 있었다.
  
  프랑스軍의 정찰기가 대부대의 이동을 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 방향으로 대부대가 기동할 리가 없다는 先入感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였다.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한 독일 기갑軍團 선봉은 5월13일과 14일 뮤즈江을 渡河하여 프랑스 세단으로 건너왔다. 취약한 프랑스 방어군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 지역으로 主攻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허약한 부대만 골라서 배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普佛전쟁의 패전에 이어 두 번째로 세단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그는 5월15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울먹였다. 레이노 수상은 격전 중인 데도 최고사령관인 가믈렝을 웨이강 장군으로 교체했다. 웨이강 장군은 中東에서 불려와 實戰에 임하는 데 이틀을 까먹었다. 그 귀중한 이틀간 프랑스군은 돌진하는 독일 기갑군단에 대한 戰略을 수립도, 집행도 못 하여 반격 타이밍을 놓쳤다.
  
  독일 기갑군단은 後續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渡河와 진격을 계속했다. 기갑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敵陣에서 고립될 수도 있지만 롬멜, 구데리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장군들의 임기응변에 의해 기갑軍團의 진격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1주간 계속되었다.
  
  독일 기갑軍團은 뮤즈강 渡河 1주일 만에 도버해협에 도착함으로써 英佛 연합군의 主力을 북쪽으로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 예비병력을 남쪽의 파리 방향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200만 대군은 불과 6週 만에 궤멸된다.
  
  아르덴느 돌파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함께 세계戰史上 가장 뛰어난 기습전으로 꼽힌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사안일주의를 간파한 독일의 정보부서, 안전보다는 모험과 속도를 중시한 롬멜, 구데리안 등 창의적인 장군들의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세적이고 관료적이며 책임회피적으로 대처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電擊的 사고와 프랑스군의 陣地的 사고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새 戰法으로 모험을 감행한 독일이었다.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의 결론에서 「독일군의 승리는 지휘부의 상상력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패배는 느린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그러한 습관을 간파하여 이 약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정리했다.
  
  영국의 戰史學者 리델 하트는 아르덴느 돌파전이 「모든 사람들의 장래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세계의 진로를 바꾼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 승리로 인해 영국은 고립되고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美蘇日까지 휘말려 들어 오늘날의 세계질서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도 이 전투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군은 너무 오랜 평화를 누리다가 프랑스군을 닮지 않았을까? 김정일의 북한군은 고생하다가 독일군을 닮지 않았을까? 경제전에서 패배한 김정일은 軍事, 思想戰에선 이기고 있다. 그는 핵무기와 남한의 從北세력이란 戰略무기를 갖고 있다. 평화공세와 연방제라는 미끼로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해체에 성공한다면 그는 武力남침을 하든지 한국 접수에 나설 것이다. 군대가 평화적인 무드와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鬪志가 사라진다. 軍과 국가 지도부마저 그런 체질에 익숙해지면 살찐 돼지가 야윈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사태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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